본문 바로가기

인생살이 시대극/미담상세리글모음

담담당당-금년은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다.

출처: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

1919년은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헌법도 이 연도를 기억해낸다. 정신의 문제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묘하고 묘한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을 앞두고 맞이 하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의 의미는 무엇일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서 적어도 1910년의 국치가 왜 왔으며, 어찌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했는지를 보라는 것은 아닌가? 1920년대 일본의 그 식량파동에 조선은 생산된 식량의 거의 대부분을 고스란히 일본에 보내야 하는 식량기지에 불과했다. 그것이 바로 수탈경제의 핵심이다. 일본은 그들의 위기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서-혹은 '천황제'에 대한 거센 저항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면- 즉각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는 데 아주 익숙했다. 이른바 <근린침탈의 본질 사유>다. 그것을 자기네끼리는 '평화'니 혹은 '우수한 자본 문화전파'로 위장한다.

 

1919년은 고종(高宗)이 승하한 해이고, 연초부터 동경유학생 향우회가 독립선언 실행방침을 논의하고 송계백이 조선독립청년단 명의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서울로 와서 이를 현상윤에게 전달하고,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이 중앙학교에서 회합, 구한국요인인 박영효, 윤용구, 한규설, 김윤식, 윤치호를 독립운동의 민족대표로 할 것과 선언서 기초는 최남선에게 맡길 것을 결정했다. 그해 1월의 일이다.

 

2월 상해의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 장덕수, 김규식, 김철 등은 김규식을 파리, 장덕수를 일본, 김철 서병호를 국내, 여운형을 러시아령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지휘하게 한다. 송진우 최린이 독립운동시위를 계획하여 비종교계와 천도교의 합작에 합의, 기독교계 포섭차 김도학 정노식을 정주 이승훈에게 보냈다. 2월 8일 일본유학생 최팔용, 서춘, 백관수, 김도인 등 6백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바로 <2.8 독립선언>이다.

 

2월 16일 재미 대한인 국민회 중앙회는 한국위임통치 청원서를 당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이를 연합통신에 발표했다. 기독교측의 이승훈, 박희도, 오기선 등은 천도교측과 합동의 독립운동 할 것을 논의했고, 이어 22일 김원벽(연전), 강기덕(보전), 한위건(경성의전) 등이 박희도와 협의하여 학생운동을 33인 중심의 운동과 합류키로 결정했다. 23일 최린 이승훈이 회합하고 천도교와 기독교 합작운동에 합의한다. 다음날에는 한용운 최린이 회합하여 불교계가 가세한다.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천매가 인쇄된다. 28일에는 재경 민족대표 25명이 손병희의 집에서 모여 3.1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보성사에서 1만부 간행했다. 그 이후 12월까지 국내에서만 26종의 지하신문이 발행되었다.

 

마침내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서울 파고다 공원을 시작으로 독립요구 시위가 계속되어 이후 6개월여 전국 각지에 파급되었다. 총참가자는 136만명, 피살된 사람만 6,670명, 부상자 14,600명, 투옥자는 52,730명에 달했다.

 

4월10일, 11일 양일간 독립운동 지도자 30여명이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내 진먼션루에서 제1회 임시의정원을 개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다.

 

이것이 역사다. 과거가 아닌 현재다.

 

미국은 이렇게 진행된 우리 일제 강점 해방 역사를 통해 이어져온 민족주의를 경계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 내에서 다시 모든 친일의 성세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국인의 심성에 흐르는 민족자존의 감성을 더욱 건드리게 되어 있다. 여론은 무서운 점이 있다. 그건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이런 강제적인 친일화 의식교육이라는 걸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분에서 담합은 없는가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너무 오랫동안 가져온  수구기득권에 의한 수탈경제는 뿌리가 너무 깊고, 거기에는 합리 보다는 늘 불합리한 이면담합과 밀실의 조작이 횡행했던 경험까지 있다.

 

결국 2009년 1월, 한일 간의 대화라는 것, 그리고 이어질 대화는 그 폭이 결정되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경제우선>으로 잣대를 들이대는 상태에서 양국의 협력에 경제외적 요소가 끼어들 틈 자체를 주지 않으려는 게 현재의 상황이니까.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게 보여질 이유는 없다. 한미일 동맹이란 틀은 미국을 상위로 한 잣대게임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구조 자체의 이완은 필연적으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계기들을 양산하게 되어 있다. 뭔가에 조급해 하는 정치세력들의 움직임을 미국이라고 해서 주목하지 않을 리는 없을 듯 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우파 연(然)하는 세력들의 맹점은 그 개념으로 친일을 가까이 함으로써 사실상의 존립 당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그들이 꺼낼 수 있는 도구는 딱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무조건 좌파몰이 메카시즘으로 대항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경제라는 말을 끼워붙이고 따붙이는 식이다. 그것은 이념도 아니며, 정신도 아닌데다가, 아주 비천하다 여겨질 정도의 추태라고 본다. 오래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작년부터 이어져온 타성과 관성인 <밀어붙이기>, <우기기> 속에 있다. 위험한 상태다. 한 걸음, 두 걸음이 더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좌표를 상실한 이완상황>이 반드시 벌어진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평화'를 내걸지만 결코 그들식의 '다떼마에'와는 다른 '혼네'를 숨기고 움직일 경우, 그들은 더 이상 한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조차 그들의 방식이 타당한가 아닌가에 대해 비판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너무 의도가 빤하다. 뭘 믿고 그러나 싶다. 알량한 경제..혹은 그런 부스러기의 힘인가?

 

왜 2009년 금년, 첫 시작을 하는 지금이 중요하고도 중요한가? 오늘 역사가 그대로 당신의 머리 위에서 뺨으로 다시 심장으로 거슬러 올라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자주, 민족자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가져야 하는 <기본이고 본질>에 해당한다. <한민족의 좌표>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검토하고 재정립해야만 하는 시대의 당위다. 작년은 지나갔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기록될 것이다. 금년은 새로 시작되었다. 첫 머리부터 아주 무겁고도 무거운 상황이 이어진다. 경제상황은 결코 호락하지 않다. IMF가 아니라거나 혹은 그럴 일이 없다는 말도 중요하지만, 살아남는 데 어찌 살아남는 길로 가는가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이 선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시대를 걸고 가는 것이다. 오늘 먹을 게 급하다고 치맛자락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 아내와 내 딸을 그리 내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다. 차라리 자유로운 이성이면 모를까 강요된 상황이라면 그건 정말 아니다. 당연히 개인이라는 주체는 그 뱃속을 채우려고 머리를 내놓을 수는 없지 않는가!

 

90주년...그리고 이어지는 국치의 100년 주기.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지금 역사와 시대의 카오스 현장에 와있다. 그리 한가롭게 생각할 때는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