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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 시대극/경제+정치+사회

쟝크리스토프-자유주조제, 암스테르담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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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조제, 암스테르담은행 [12]

조회 113510.07.02 18:28



1.더 바보이론(The Greater Fool Theory)

2.튤립광풍(Tulipmania)

3.자유주조제, 암스테르담은행

4.존로Jhon Law

5.존로의 화폐이론

6.미시시피버블

7.South Sea 버블

8.통화량의 증가와 투기버블

9.오스트리아학파의 과오투자 이론(Malinvestment Theory)

10.과도기....그리고 대안없는 미래


......

 


로마제국이 몰락한 뒤, 유럽 곳곳에서는 여러가지 다른 화폐시스템이 횡행했는데, 각국의 왕들은 기존에 그들이 가진 금화나 은화를 없애기 위해 안달이 났었다고 합니다. 우선 이 당시 동전들이 일반적으로 개별 주(individual states)들에 의해 각각의 비동치화된 법정화폐로써의 가치비율이 정해졌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주화제조라는 최고의 권리가 유럽내 모든 주권국가들에 의해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합니다. 


또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동로마)이 무너진 뒤, 기존에 부여되었던 주조권에 대한 신성한 이미지가 대부분의 동전에서 사라지게 되었는데, 물론 이러한 신성성은, 동전이 변화되고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미신에 사로잡힌 대중들에게까지 여전히 남아 있었던 탓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들의 입장에서는 신성성이 제거된 동전의 구성이나 가치를 만들어낸다는것이 상당히 어려웠었기 때문에, 따라서 강제적인 가치조정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하므로써, 금화나 은화는 유럽대륙의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애꿎은 고통을 받게 된것이...당시의 화폐적 시대상황 이었습니다. 


이는 곧 민중에 대한 핍박과 같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동전(민중)의 "착취당하고", "갈라지고", "비명을 지르는"것은 훗날, 대부분의 유럽 지배자들이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었던, 17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그 와중에 왕들은 방탕한 생활과 전쟁으로 인해 텅 비어버린 국고를, 화폐의 평가절하를 이용해서 금방 다시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점에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챨스5세는 화폐가치의 변경에 대해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만행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 내의 이러한 화폐변경 의도는 결국 1524년, 통화법령의 포고를 불러오게 되었고, 결국 챨스5세는 금화의 가치를 은화의 가치에서 9배....10배...최대 11과 3/8배까지 올려버리는 참혹한 화폐개혁을 단행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챨스 5세의 이런 조치가 1524년 이전의 금화 가치로 낮춘것이 아닌, 은화의 가치를 오히려 거의1/10 수준으로 절하시킨 효과를 불러온 것이었기 때문에 1542년, 네덜란드 국민들은 이렇게 된 이유도 모른채 엄청난 고통을 무조건 감수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546년, 챨스 5세는 다시 한번 가격을 후려 쳤는데, 금화의 가치를 은화 대비 무려 13배나 갑작스럽게 올려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처음에는 은화의 평가절상, 그다음에는 은화에 대한 시장가치와 관련된 평가절하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화폐의 과대평가는 정상적인 유통을 벗어난 화폐의 평가절하를 가속화 시켰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라는 그레샴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은화의 가치는 54그레인스파인(grains fine/ 형량의 최저 단위 = 0.064g)에서 35그레인스파인으로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홀란드(네덜란드)의 최우선 유통 수단이된 은화는 이 조치로 1523년의 가치에서 무려 1/3 수준으로 떨어지므로써 화폐공급을 그만큼 감소시키게 되었으며, 금의 가치 대비 거의 50% 가까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치로 인해, 국민들의 피를 짜내는 고통을 담보로 챨스5세는 그의 텅빈 국고를 다시 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46년에 일어난 이 말도 안되는 조치에 대해, Del Mar는 "그 빨대는 오래동안의 고통을 참아내도록 강요받아온 시민들의 인내심을 부셔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평했습니다. 거센 화염속에서 혁명의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음을, 챨스5세 역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음에도 방치, 이른바 1566년 "거지들의 연합 Confederation of Beggers"이 결성된 뒤, 그로부터 6년 후 혁명을 공식 선포하게 됩니다.


혁명정부가 추진했던 첫번째 조치중 하나는 "자유로운" 또는 "개인적인" 주조권의 보장이었습니다. Helfferich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금속이 돈으로 변하는 규제를 푼,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가장 단순하고 특별한 사례는 "자유로운 주조권" 또는 "민간 계정으로 주조하는 것"이다. 국가가 주조권을 포기하게 되면 금속의 양이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화폐를 주조할 것이며, 금속을 건네받은 받은 사람들의 부담은 전혀 없거나 최소한의 비용만을 부담하게 될 것이다. 금속을 제공한 사람들은 화폐주조세를 전혀 감면받지 못하거나 일부만을 감면받으므로써 건네준 금속대신 동전으로 받게 된다..."


자유주조권에 대한 아이디어는 포르투갈로부터 그 컨셉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네덜란드 동인도(Dutch East Indians)에서 다시 네덜란드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자유주조권의 시행은 인도의 무슬림 정부를 악질적으로 변질 시키키기도 했으며, 1555년 마스카렌하스Mascarenhas가 이를 다시 카피했다고도 합니다....


당연히...자유주조권은 단숨에 성공했습니다. Helfferich는, 

"....민간이 미국에서 획득한 금괴와 은괴의 소유자들은, 유럽의 왕자들이 강제로 부과하는 화폐주조세를 기피하기위해 그동안 부질 없는 노력을 계속 해왔지만, 이제 도망가기 위한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들은 가지고있던 금괴나 은괴를 홀란드로 보내기만 하면, 길더(Guilder/네덜란드 화폐단위)나 듀켓(Ducats/금화 또는 은화의 현금), 은행 기장용 통화라는 명목하의 은소재 금속으로 바뀌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17세기가 시작되면서 네덜란드는 유럽인들과의 교역 뒤에서 자국 화페에 대한 힘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당시 홀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무역의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암스테르담의 화폐는 이웃 국가들의 동전을 제일 우선시 했으며, 자국의 동전은 그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암스테르담에 들어와있던 수 많은 종류의 해외 동전들은 닳거나 손상되었고, 결과적으로 "법정화폐 기준" 이하인, 암스테르담 통화 대비 약 9%정도의 가치가 감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통구조상 이미 평가절하된 기존동전을 새로 만들거나 하므로써 추가로 집어 넣는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 해지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낡은 동전을 대체할 완전히 새로이 주조된 외국 동전이 유통될 시, 이 동전들은 신속하게 징수되었고, 다시 녹여, 금괴로 만들어져 수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이러한 역진적인 방식은 점차 보편적으로 되어갔으며 상당히 빠르게 확대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통화의 가치하락은 결국 법정통화인 동전들의 상태를 악화시킨데에 따른 것으로, 돈의 가치를 일부러 과대평가 시키므로써 악화(惡貨)의 양화(良貨)화를 가속 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바꿔놓은것이 바로 1609년에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이었습니다. 이 은행은 모든 정화(正貨)거래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고리대금을 억제, 거래를 용이하게 했지만....그러나 놀랍게도 이 은행의 주요 기능이 유통과정에서 동전을 위조하고 예금의 인출을 남용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일반적으로 동전은 표면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닌, 금속의 무게나, 동전이 가진 본질적인 내재적 가치에 의해, 예금 대비 은행에서 발행된 돈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비로소 예금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에서 발행된 새로운 형태의 돈은 암스테르담 시에서 그 가치를 보증했으며, 안전하고 편리성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이후 동전에 대한 프리미엄이라든가, 환전수수료를 받게 만든 뱅크머니의 직접적인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형태의 프리미엄(4~6¼%)이 생겨났지만,  동전의 (실제가치)비율은 표면, 또는 명목 가치 이하로 평가절하 되어 나타나는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은행이 제공하는 서비스중 하나는 은행의 예금계좌를 이용, 지급인과 수취인이 서로 만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금을 이동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이를 현대식 금융용어로 말하자면 지로제(制), 또는 은행 대체(代替) 제도(Giro Banking Operation)라고 합니다. 이 서비스의 실시로 은행에서 직접 예금을 인출하는 일은 매우 드물게 발생했고, 또 매우 대중적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금자들이 자신들의 정화를 다시 찾고 싶어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뱅크머니에 프리미엄을 붙여서 되 팔았는데, 뱅크머니를 구매할 사람들을 찾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은행계좌를 갖고있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뱅크머니에 대한 수요는 늘 있었다고 합니다. 아담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와 관련된 글을 실었습니다.


"...은행의 지불 청구로, 은행 신용의 소유자들은 프리미엄의 손해를 보았다. 600만 길더 그 이상의 금액을, 암스테르담에서 협상한 모든 어음을 이용하여 추가로 요구한 암스테르담시의 보증은, "어음의 불확실성을 모두 제거하기위해" 뱅크머니에서 요구받은 금액 전부를 지불해야만 했고, "뱅크머니에대한 특정한 요구가 불가피하게 일어날 경우"를 대비, 은행 계좌를 갖고 있도록 모든 상인들을 강제했다...."


아담스미스는 뱅크머니를 발행한 암스테르담 은행의 구조체계를 설명하면서, 은행은 금괴가 가진 그 당시 화폐가치의 대략 5%이하에서, 금괴나 은괴로 예금된것에 대한 장부를 적고(계좌개설) 그것으로 신용(뱅크머니)를 주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은행 신용으로써 발행된 어음을 가진 예금자들은 6개월 이내 은행에 예금된 금괴를 인출할 수 있는 영수증을 받았는데, 이는 예금자 또는 지참인으로써의 자격을 보증한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금괴를 되찾으려는 사람은 몇가지를 제출해야만 했는데,  1)금괴에 대한 영수증, 2)장부에 기입된것과 같은 뱅크머니, 3) 은괴에 대한 수수료 0.25%, 또는 금괴에 대한 수수료 0.5%를 지불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추가로 6개월을 연장하는데 필요한 연장 수수료를 내지 않고, 중간에 맡긴 금괴를 회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기가 되면, 그동안 받아왔던 수수료를 예금에서 강제적으로 은행에 귀속시키거나, 신용을 명의변경장부(Transfer books)에 작성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례로 판단컨데, 은행은 예금자가 6개월의 기간내 예금을 회수 하지 않을경우, 예금 보관에대한 5%의 수수료를 강제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경우에 가장 높은 수수료를 물렸었는데, 금이 보관상 리스크가 가장 크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며, 또 가장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금괴에 대한 영수증은 만기까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우라면, 금예금 이자가 예금 수수료 보다 더 높았을 때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암스테르담은행의 의무와 결합하여 두가지의 분리 수단을 창조해 내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금괴를 예금하여 은행신용과 영수증을 획득한 사람은, 은행신용이 만기가 되면 환어음(bills of exchange)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금괴의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는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계속갖고있거나 판다. 영수증과 은행신용을 함께 장기간 소유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그렇게 해야할 만한 일이 일어나는 일 또한 없다. 영수증을 갖고 있는 사람, 그리고 금괴를 갖고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늘 충분한 은행 신용과 일반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뱅크머니를 구할 수 있었으며 , 그리고 뱅크머니를 갖고 있는 사람과 금괴를 갖고 나가려는 사람은 늘 똑 같은 양의 풍부한 영수증을 찾아낸다. 


뱅크머니의 소유자들은 그가 원하는 금액 만큼의 은행 영수증을 만들지 않고서는 금괴를 가질 수 없다. 만일 그가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는 그것(뱅크머니나 영수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를 구매해야만 한다. 영수증을 갖고있는 사람은 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 은행가보다 5%가 높은 주조가격(Mint Price)의 뱅크머니를 구입해야 했다. 그러므로, 5%의 환전 수수료(프리미엄)는 금 구매에 따른 일반적 비용으로, 가상이 아닌(신용창조) 실제 가치에 대한 지불이었다. 뱅크머니를 가진 사람은, 그가 영수증을 구입할때, 주조 가격보다 높은 일반적인 시장가에서 2~3%의 프리미엄을 주고 영수증을 구입한다. 이것 역시 금을 획득할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다. 따라서 그가 지불한 영수증의 가격은 마찬가지로 실제가격에 대한 비용 지불이었다. 영수증의 가격과 뱅크머니의 가격은 금의 가격과 전체 가치 사이에서 복합적으로 만들어진다...."


스미스가 위에서 설명한 것과 똑같은 시스템이 은행에 예금 되어있는 동전에도 역시 적용되었습니다. 스미스는 주화를 예금하는것이 금괴를 예금하는것보다, 은행 권력에 점령당하기가 더욱 쉬웠다고 단언합니다. 은행에 6개월간 보관해주는 수수료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일반적으로 뱅크머니의 (스미스가 5%라고 지적한)높은 환전 수수료로 인해 영수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영수증이 만기 되었을때 사용된 뱅크머니의 액수는 뱅크머니의 총액과 비교해 볼때 매우 적었다고 합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지난 수십년동안 유럽의 금을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였지만, 거기서 사용된 영수증은, 그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은행으로 떨어지는, 또는 만기까지 남아있는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뱅크머니의 가장 큰 부분은 은행 장부에 기입된 신용인데, 금괴 딜러들이 예금처럼 그것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거나 보증하므로써, 오랜세월 동안 창조해 왔던것으로 생각된다...."


은행은 암스테르담 시에서 높은 이윤을 얻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서술한 창고업과 환전수수료를 위한 뱅크머니의 판매외에도, 신규 예금자들이 계좌를 열기위헤 10길더의 수수료를 지불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금자들이 그 다음 두번째 계좌를 개설할때는 3길더의 수수료만을 냈다고 합니다. 이체시에는 2길더의 수수료를 내야했고, 600길더 이하의 이체일 때는 예외였는데, 600길더 이하에 대한 수수료는 6길더(소액 이체를 줄이기 위해)였다고 합니다. 예금자들은 한 해에 두번 그들의 계좌에 잔고를 유지하도록 은행으로부터 요구 받았다고 합니다. 만일 예금자들이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25길더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이외에도 3%라는 수수료는 만일 예금자가 자신의 계좌에 있는 금액보다 더 많은 이체를 해야할 경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이 업무를 시작할때는 신용(Credit)기능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모든 뱅크머니를 100% 정화로 보증하는, 예금 은행으로 제한 되어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의 행정은 소규모 시정부 관리들로 위원회가 꾸려 졌는데, 이 위원회의 역할은 은행의 기밀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위원회의 설립취지부터 본래가 비밀스러웠기 때문에, 개인 예금자들이 1657년 초까지 그들의 계좌를 이용해서 수표를 과다 발행했었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것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 해 말, 암스테르담 은행은 동인도 회사와 암스테르담 자치단체에 엄청난 대출을 해 주기 시작 했습니다. 이후 1790년까지 이루어졌던 대출은 뱅크머니에 대한 프리미엄이 보통은 4%대 였지만, 때로는 6.25%까지 높아지기도 했다가, 후에 2퍼센트까지 떨어지면서....결국, 사라지고 맙니다. 1790년 말, 이 은행은 10%할인된 가격으로 뱅크머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은을 팔았던 사실에 대해 공시적인 통지문을 발행하므로써 사실상 채무불이행, 파산상태가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따라 암스테르담 시는 1791년 은행을 매각.... 1819년 12월 결국 영원히 문을 닫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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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너무 길어져 이후의 튤립버블과 연계된 글을 한번 더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지난 글에 댓글로 좋은 말씀을 주셨던 분의 고견대로...

글의 난해함이나 난잡함등을 고려해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있는것 같아...

이 부분만 마무리 하고 글 쓰기는 잠시 자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왕 글을 쓰는것...

아무래도 공부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글을 쓰는것이 옳은 일이겠죠....^-^


부족한 글에 관심주시고 읽어주셨던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나 오랜만에 인사드렸던 분들... 

해수사랑님, 4막5장님, xrith님, lognleg님,

라임향님, skybluelove님, taiwan님, 제주도 푸른바다님, spirit님, wazo님 등 그외 다른 분들까지...

다들 너무너무 반가운 닉이었습니다. ^-^


비록 며칠간이었지만 제대로 인사 못드린 것 사과드리구요... 

열심히 노력해서 곧 다시 찾아 뵐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무쪼록 행복하고 편안한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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