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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 시대극/경제+정치+사회

친일반민족자들이 독립후손을 욕보이는 나라!

이 대한민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집안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다행히 민주당의 이종걸 의원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일찌기 군사독재, 친일반민족 집단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뚜렷한 민족적 발자취를 재발견할 수 있다.
민주당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썩은 냄새 풀풀 풍기는 천하의 ..., 천하의 반민족자들과 어찌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있을까?
이 땅에 서러운 눈물처럼 서리내린 친일과 부패, 부조리, 반민족 부역자들이 설쳐대는 숨쉬기 힘든 나라!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魂을 팔아먹던 者들이 헌법전문의 임정의 가치까지 부정하는 사태는 심각하다 못해 위험한 지경이다.
어제의 대통령 시정연설에서 또다시 대한민국 건국60년이라는 망발을 토해내는 나라!
이제는 친일, 반통일, 사대주의,반민족적인 세력들과 일전을 벌여야 할 판이다.
작금의 경제 위기를 세계 탓, 전정권 탓, 국민 탓으로 책임전가 하는 국가의 정체성, 역사적 정체성이 전무후무한 정권...
 
경제적인 도덕, 윤리성이 없는 집단이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받겠는가?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논리로 금융권의 방만한 경영을 국민에게 빚 보증 서게 하는 정체성...
 
이것은 정말 심각한 대한민국의 위기상황입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깨어나는 국민에게는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돈보다, 그 어떤 개발독재보다, 건설로 나라를 봉헌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존귀한 대한민국의 정통성 있는 역사는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6형제의 이야기는 가슴아픈 우리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과거를 잊어 버리는 자!
결코,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회영 선생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앞장선 로마의 귀족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사망한 영국 이튼스쿨의 상류층 자제들, 이들 귀족층의 권위는 다름 아닌 그들이 품었던 사회적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이라 불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역대 서구사회의 지도층을 관통하는 핵심적 윤리다.


그렇다면 한국 전통 명문가에 흐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없는가?
경주 이씨 백사공파(白沙公派)우당(友黨) 이회영의 가문에서 우리는 그 전통을

발견한다.



우당 집안이야말로 한국적 노블레서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집안이었음이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 우당의 집안은 세간에서'삼한갑족'이라고 일컬어졌다.


조선의 경반(京班 :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과 향반(鄕班 : 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을 통틀어 최고 명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집안이다.


명문 중에서도 명문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면 백사 이항복이래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때 우당의 동생인 성재 이시영이 부통령을 지냈으니 성재까지 영의정급에 포함시키면 도합 11명의 재상급 인물이 한 집안에서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재상의 집안'이 지니는 사명감은'재상의 집안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한다'로 이어졌을 것 같다. 노블레스 집안이 행해야 할 처신의 전형을 이 집안의 증시조에 해당하는 백사 이항복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임진왜란시 평안도로 임금의 피난 방향을 정함으로써 임금이 왜군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하고 의주에서는 임금에게 '영호남 3도에 특사를 보내 임금이 요동(만주)으로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다' 는 칙명을 내리도록 설득해 국민들을 단결시킨 백사 이항복의 슬기로운 판단은 '재상의 집안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한다' 는 사명감으로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하여 한일합방이 이뤄졌을 때 우당 6형제는 더 이상 왜놈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치욕적이라 판단, 중국망명을 결심했다.
평소에 노비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하소' 를 한 이씨 형제들은 이미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켰지만 몇 명의 노비들은 우당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60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눈 내리는 12월의 날씨에 수 천리 만주벌판을 향해 순전히 자의에 의해 전 재산을 나라에 바치고 만리타향 만주로 떠나는 조선 최고의 귀족집안, 우당.

 

우당 일가족이 두만강을 배로 건널 때도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두만강을 건네 준 뱃사공에게 아주 후하게 뱃삯을 지불하였던 것. 뱃삯이 10원이었는데 그 두 배인 20원을 지불하였다. 그리고는 고마워 어쩔줄 몰라 하는 뱃사공에게 우당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내게 고마워하지 말고 한 가지 일을 해 주시오. "


"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


"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


" 어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제힘이 닿는 한 독립군들을 배로 실어 나르겠

습니다. "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청산리 전투의 정예요을 기른 우당 집안.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리고 격렬하게 항의한 우당 이회영과 항의 표시로 관직을 그만두며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한 성재 이시영.


또한 신민회를 결성하고 간도 용정에 서전의숙을 설립해 현지 교포들에게 민족 교육을 제공하며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일제치하 실향민의 터전과 독립운동의 전지기지를 마련한 우당집안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솔선수범으로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집안이다.


우당은 마음만 있었으면 모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지만 중국에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러한 고생스러운 삶이 역사평론가 이덕일이 쓴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들' (2001)에 소상하게 나온다.


'남개(중국의 톈진)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음 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정화암 자서전)

 

성재 이시영은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인재양성 기관을 염두에두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을 세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신흥대학은 현 경희대의 전신이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하고는 하였다.


" 해방되면 우당 집안의 재산은 국가에서 되돌려주어야 한다! "

 

서울 종로구 선교동 농아학교 앞에는 우당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우당 집안사람

들의 여러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볼 만하다. 우당의 지론 가운데 하나가 " 독립

을 위해서는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는 것이고, 이 지론에 따라 우당장학회를 운영

하고 있다.


우리나라 1,600여 장학재단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을 돕는 유일한 장학재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 신성한 대한민국의 역사에 테러를 하려는 자들!

역사의 진실은 결코 이 천박하고 반민족적인 역사 거꾸로 쓰기를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자와 살인마를 영웅으로 미화, 각색하려는 썩어빠진 역사의 폐륜아들...

정녕, 너희들이 이 신성한 대한민국 땅에서 활개를 친단 말이더냐?

 

족보도 없는 자들이 왜 이토록 탐욕으로 침탈한단 말인가?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031034&hisBbsId=D003&pageIndex=1&sortKey=readCount&limitDate=-30&lastLimitD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