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륭투쟁과 <분노의 포도>

▷'분노의 포도' : 성경의 '하나님의 분노가 포도처럼 끓었다'에서 인용
존 스타인벡이 쓴 <분노의 포도>는 대공황기 미국,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일자리를 찾아 수많은 노동자들이 캘리포니아 포도농장으로 몰려들고, 지주들은 살인적인 저임금과 노동강도로 이들을 괴롭힌다. 지주들은 청부업자를 동원하여 파업을 분쇄하고 심지어 노동운동 지도자를 살해해버린다.
지주들은 농작물 가격을 올리기 위해, 노동자들이 배를 곯든말든 오렌지에 석유를 뿌리고 감자를 물에 던진다. 돼지를 산 채로 파 묻는다. 그걸 보는 노동자들의 눈에 분노가 지핀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간다."
(10월 21일 고공철탑에 매달린 사람들을 연행하는 경찰특공대-한겨레)
기륭, '작전종료'
1200여일에 걸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죽는 것말고 안해본 것이 없다"는 노동자들. '분노의 포도'는 이 노동자들의 영혼을 비유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말이다. 그러나.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많이 질문들 하십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21일 촛불문화제의 사회를 보던 여성조합원의 말이다. 노조가 마지막이란 각오로 공장 앞에 세운 고공철탑은 이날 경찰과 용역들의 '공동작전'으로 무너졌다. 살기등등한 그들의 폭력에 농성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김소연 분회장은 연행되었다. 조합원들은 넋을 잃었다. 회사는 대형트럭을 동원해 건물 내 남은 짐들을 모두 반출해버렸다.
그날 밤 모인 200여개의 촛불들은, 이제 직원도 구사대도 생산라인도 아무 것도 없는 유령 같은 회사 앞에서(일부 용역들이 '가스통'을 들고 그 안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난 15일과 20일에도 용역의 무자비한 난동과 싸우며 투쟁을 이어왔지만, 이날 저들은 사실상 '작전종료'를 선언했다. 조합원들의 한숨의 무게가 꽉 닫힌 정문보다 더 무거워보였다.

(연행되는 김소연 분회장)
한국 비정규직 싸움의 역사가 된 기륭전자
기륭전자는 2005년, 200억이나 흑자를 내면서도 생산직 노동자 300여명 중 250여명을 파견업체로부터 충당했다. 임금은 월 65만여원. 노동부가 '파견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회사에 시정을 요구하자, 기륭은 파견직을 직접고용하는 게 아니라 파견업체와의 계약을 해지시켜버렸다. 이렇게 노동자를 통째로 잘라내고, 라인을 약간 조정한 후 새로운 파견회사를 집어넣었다. 사측은 '벌금 500만원을 납부했다'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이 노조를 만들어 해고에 반대하자, 사측은 "겨우 10여 명의 시위자뿐"이라며 노조를 무시했다. 그러면서 왜 이들 때문에 적자가 269억원이나 났고 회사가 휘청거린다고 아우성일까? 그렇게 어렵다던 기륭전자는 작년, 최동렬 회장을 '모셔오는' 과정에 그가 소유하던 회사를 무려 4백억원에 인수했다. 이 회사는 자기 자본이 12억밖에 되지 않고 연이은 적자로 자본 80%가 잠식된 부실회사였다.
기륭전자는 작년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며 500여명의 사원을 100여명으로 줄였다. 부실경영과 생산비 인상의 부담 때문이었다. 그런데 회사는 이 마저 '10여 명'의 노조 탓이라 했다. 사측의 망발과 무책임 속에 투쟁이 1천 일을 넘겨 사회문제가 되자, 회사는 여론에 못이겨 노조와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노조는 협력회사로 들어가라는 사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측은 "해고자 33명의 지난 4년간 임금 및 피해보상으로 19억원을 지불하라"는 노조의 요구를 빌미로 협상을 결렬시켰다.
19억원이라고 해도, 1인당 연봉 1500만원 정도를 기준으로 한 체불임금을 달라는 것이었다. 노동자들과 그 가족이 겪은 물질적, 정신적 고통에 비해 결코 많은 액수는 아니었다. 심지어 회사는 홈페이지에 "수출업체인 기륭전자는 올 3분기에만 환차익으로 19억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회사를 위해 한달 100시간씩 잔업특근을 꺼리지 않았던 노동자들을 진정 품어 안으려 했다면, '거저 얻은 거나 다름없는' 19억원을 쓰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문제의 원인은 기륭의 무책임함에 있다
사측의 입장은 시종일관 "비정규직의 고용도 해고도 내 책임이 아니며, 노조로 인해 우리가 피해를 입었고, 노조가 고개 숙이고 들어오면 적당히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의 원인은 파견법을 어기면서 불법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그것이 적발되자 노동자를 해고시켜버린 회사에 있다. 기륭의 경우 비정규직은 법에 명시된대로 '불가피한 경우에만 쓰는' 인력이 아니라 생산의 주축인력이었다. 회사가 고용과 해고에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기륭의 노동자들은 도대체 누구와 함께 누구를 위해 일했단 말인가?
노조는 사측의 결자해지를 원했다. 그러나 기륭은 3년토록 냉소와 폭력으로 일관하다가, 이젠 흑자를 올리면서도 중국으로 '먹튀'할 판이다. 이명박 정부가 정말로 '일자리 창출을 지상과제로 삼는' 정부라면, 이런 기업을 엄격히 제재하고, 일하길 원하는 해고노동자들을 복직시키도록 조치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기업은 생산라인을 빼돌리고, 노동자는 그것을 막고, 정부는 경찰을 보내 그 노동자를 잡아간다. 이명박 대통령이 '프렌들리'하는 대상은 경제도 아니고 비지니스도 아닌, '기업주의 돈벌이'일 뿐인가.

(집회 중인 기륭전자 비정규직 조합원)
이 싸움은 '인간다움'을 위한 싸움이다
<분노의 포도>의 결말에, 파업에 실패하고 폭우로 집까지 잃은 노동자 가족이 굶어 죽어가는 한 늙은 노동자를 만난다. 로져샨은 이 노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젖을 물린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노동자 민초들이 결코 잃지 않는 강한 생명력과 인간다움을 역설한다.
"투쟁 외엔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다른 길이 있다면 정말 그걸 해보고 싶은데, 정말 다른 길은 안 보입니다. 미국에 원정투쟁 간 동지들과, 여기 모여주신 촛불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촛불문화제 속에 힘을 얻었는지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다시 밝아졌다. 노동자는 패배할 수는 있어도 그의 생명력과 인간다움은 빼앗을 수 없다. 인간은 휴지조각이 아니라는 그들의 처절한 목소리와, 1000동안 서로 손을 놓지 않는 조합원들 그리고 달려온 촛불시민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싸움은 기륭전자만을 넘어, 야만적인 비정규직 제도를 옹호하고 재생산하려는 측과 이를 반대하고 철폐하려는 측의 싸움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 900만의 시대, 분노의 포도가 그득그득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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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시리우스 본사 항의방문 중에 삼보일배에 나선 기륭원정투쟁단)
기륭전자 노조원 원정투쟁단이 29일(현지시간)맨해튼 6애버뉴 49가 시리우스사 앞에서 뉴욕 원정 마지막 시위를 가졌다. 이날 시위에는 미국 노조단체연합 UAE 관계자들도 참석해 힘을 보탰으나 시리우스관계자 면담은 끝내 불발로 끝났다. / 【뉴욕=뉴시스】 정재두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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