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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놀이터/ai 소설

1. 해운당의 밤

비가 사흘째 멈추지 않았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일정한 간격으로 마당의 돌확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관 뚜껑을 천천히 긁는 소리 같았다.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는 흙길은 이미 진흙탕이 되었고, 전화선은 어젯밤 벼락을 맞은 뒤 죽은 뱀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날 밤, 해운당에는 일곱 명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어 있었다.

1. 해운당의 밤

해운당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오래된 별장이었다. 산허리에 매달린 듯 서 있는 검은 목조 건물. 기와는 곳곳이 내려앉았고, 복도는 걸을 때마다 오래된 갈비뼈처럼 삐걱거렸다. 벽에는 습기가 번져 사람 얼굴 같은 얼룩을 만들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창호지가 배 속에서 새어 나오는 숨처럼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나는 그곳에 초대받은 손님 중 하나였다.

이름은 서도윤. 직업은 추리소설 작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몇 권의 책이 팔렸고, 몇 권은 잊혔다. 다만 이상한 사건이 생기면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 때문에 나는 종종 원치 않는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이번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윤태오였다.

부동산 개발업자, 미술품 수집가, 그리고 돈 냄새를 맡는 데에는 사냥개보다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는 남자. 그는 해운당을 사들인 뒤, 이곳에서 작은 만찬을 열겠다고 했다. 초대장은 손으로 쓴 검은 글씨였다.

“오래된 집은 오래된 비밀을 품고 있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밤, 그 비밀을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

그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웃었다. 부자들의 과시욕이란 언제나 연극 같았다. 하지만 초대장을 받았던 다른 사람들은 웃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해운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윤태오와 얽힌 과거가 있었다.

  • 강문식: 전직 형사. 윤태오의 불법 거래를 조사하다가 옷을 벗었다.
  • 한재희: 정신과 의사. 윤태오의 죽은 아내를 상담했던 사람.
  • 오세린: 바이올리니스트. 윤태오가 후원했다가 버린 여자.
  • 백승호: 윤태오의 비서.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 정미란: 윤태오의 이복누나. 재산 문제로 오래 다퉜다.
  • 나, 서도윤: 윤태오가 좋아하던 작가라기보다는, 그의 실패한 자서전을 대필할 뻔했던 사람.

그리고 주인 윤태오.

그는 저녁 여덟 시 정각, 식당에 나타났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입가에는 늘 웃음이 있었지만 눈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검은 실크 셔츠 위에 짙은 와인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수정잔을 들고 식탁 끝에 섰다.

“여러분,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밖에서는 천둥이 굴렀다. 천장이 아주 낮게 내려앉는 듯한 소리였다.

윤태오는 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오늘 밤, 해운당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정미란이 먼저 웃었다.

“무슨 장난이야, 태오야?”

“장난 아닙니다. 유언장을 다시 썼거든요.”

그 순간, 식당의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처럼 얇아졌다.

윤태오는 즐거워 보였다. 남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의 취미라는 듯, 그는 천천히 식탁을 따라 걸었다. 그의 구두 굽이 마룻바닥을 눌렀다. 탁. 탁. 탁.

“여기 계신 분들 중 누군가는 내 재산을 받을 겁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못 받을 거고. 또 누군가는… 감옥에 갈 수도 있겠죠.”

강문식이 낮게 말했다.

“술 마셨으면 헛소리 그만해.”

윤태오는 강문식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강 형사님은 아직도 형사 같군요. 그 버릇 때문에 모든 걸 잃었는데.”

강문식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백승호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한재희는 물잔을 만지작거렸다. 오세린은 창밖을 보았다. 빗물에 젖은 유리창 너머에는 검은 숲이 있었다. 숲은 오래전부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때 윤태오가 주머니에서 작은 은색 열쇠를 꺼냈다.

“유언장은 서재 금고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금고의 암호를 아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그는 열쇠를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은색 빛이 촛불에 스쳤다.

“만약 오늘 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난처해지겠군요.”

그 말은 지나치게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는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2. 첫 번째 비명

만찬은 불편했다.

은식기는 차갑고, 고기는 질겼고, 대화는 자주 끊겼다. 창밖의 비는 더욱 거세졌다.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해운당의 창문을 흔들 때마다 유리가 몸서리를 쳤다.

밤 아홉 시 반, 윤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서재에 다녀오겠습니다. 여러분은 편히 계세요.”

그는 잔을 내려놓고 식당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그 후로 우리는 대략 삼십 분 동안 식당에 남아 있었다. 아무도 편하지 않았다. 정미란은 담배를 피우려다 한재희의 눈치를 보고 내려놓았다. 오세린은 오른손 검지로 식탁보의 자수를 계속 문질렀다. 백승호는 시계를 세 번이나 확인했다.

강문식은 그런 백승호를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불안해해?”

백승호가 움찔했다.

“아닙니다.”

“아닌 얼굴이 아닌데.”

“정말 아닙니다.”

그때였다.

위층에서 비명이 들렸다.

여자의 비명이었다.

날카롭고, 짧고, 목 안쪽에서 찢겨 나온 소리.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안다. 놀람이 아니라 공포. 공포가 아니라 발견.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명은 오세린의 것이었다.

그런데 오세린은 식당에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세린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 아니에요.”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위층 복도에서 누군가 뛰는 소리였다. 우당탕, 쿵, 끼익. 오래된 마룻바닥이 발밑에서 비명을 질렀다.

강문식이 먼저 움직였다.

“올라가!”

우리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촛불을 들고 앞장선 강문식의 그림자가 벽에 크게 흔들렸다. 마치 그보다 먼저 무언가가 계단을 기어오르는 것처럼.

서재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강문식이 문을 밀었다.

문은 끼이이익, 하고 길게 울었다.

그리고 우리는 윤태오를 보았다.

그는 서재 한가운데의 카펫 위에 엎드려 있었다. 와인색 재킷이 검은 그림자처럼 바닥에 퍼져 있었다. 왼손은 가슴 밑에 깔렸고, 오른손은 앞으로 뻗어 있었다. 손가락들은 마치 마지막 순간에 뭔가를 붙잡으려 했던 듯 구부러져 있었다.

그 손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은색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

강문식이 몸을 낮췄다. 윤태오의 목 옆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잠깐의 침묵.

“죽었어.”

정미란이 입을 틀어막았다.

한재희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오세린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백승호는 문지방 옆에 서서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서재는 넓었다. 벽 세 면이 책장으로 덮여 있었고, 나머지 한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창문은 잠겨 있었다. 비가 유리 위를 사납게 때리고 있었다. 방 안에는 벽난로가 꺼진 채 있었고, 책상 위에는 녹색 갓의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금고는 책장 뒤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책장 하나가 열린 상태였고, 그 안쪽 벽에 작은 금고가 박혀 있었다.

금고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금고의 다이얼에는 피 묻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강문식이 낮게 욕을 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그때, 바닥에서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윤태오의 오른손 검지. 손톱 밑에 검은색 가루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바닥 안쪽에는 아주 미세한 상처가 있었다. 종이에 베인 것처럼 얇은 상처.

강문식이 나를 흘겨보았다.

“작가 양반, 괜히 추리 놀이 하지 마.”

“그럴 생각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미 추리하고 있었다.

3. 닫힌 방

일단 서재는 밀실처럼 보였다.

창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빗물 때문에 밖에서 접근한 흔적은 없었다. 서재는 위층 복도 끝에 있었으며, 그 앞을 지나려면 계단을 올라와 반드시 복도를 통과해야 했다.

우리가 식당에 있던 동안 위층으로 올라간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에는.

강문식은 사건 현장을 조사했다. 전직 형사라 해도 몸에 밴 습관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문손잡이, 책상, 창문, 금고를 차례로 살폈다.

“사망 원인은?”

한재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의사였으나, 시신 앞에서는 손끝이 떨렸다. 그는 윤태오의 목과 눈, 입가를 확인했다.

“정확한 건 부검해야 압니다. 하지만… 독극물 가능성이 있어요.”

“독?”

“입술 색이 이상하고, 동공 반응도 그렇고요. 외상은 없어 보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식당에서 마신 술잔을 떠올렸다.

하지만 윤태오는 우리 앞에서 같은 와인을 마셨다. 식탁에 있던 병도 하나뿐이었다.

강문식은 백승호를 쏘아보았다.

“서재에 따로 술이 있나?”

“가끔 코냑을 드십니다.”

“어디?”

백승호가 책상 옆 작은 장식장을 가리켰다.

강문식이 장식장을 열었다. 안에는 코냑 병과 잔 두 개가 있었다. 병은 거의 비어 있었고, 잔 하나에는 갈색 액체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남아 있었다.

강문식이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 이 안에 독을 넣었을 수도 있겠군.”

정미란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럼 그걸 누가 넣었는데? 우리는 다 같이 있었잖아!”

“만찬 전에 넣었을 수도 있지.”

“그럼 아무나 범인이란 소리잖아.”

“맞아.”

그 대답에 방 안이 더욱 차가워졌다.

나는 코냑 잔을 바라보았다. 잔의 가장자리에 입술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잔 밑부분에는 이상하게도 아주 작은 흠집이 있었다. 누군가 잔을 급히 내려놓았을 때 생긴 자국 같았다.

또 하나.

서재의 공기에는 코냑 냄새 말고도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젖은 흙냄새.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나는 바닥을 살폈다. 카펫 위라 발자국은 남기 어려웠다. 그러나 문 근처 마룻바닥에는 작은 진흙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바깥 흙길의 붉은 진흙이었다.

“누군가 밖에 나갔었군요.”

내 말에 모두가 나를 보았다.

강문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

나는 문 옆을 가리켰다.

그는 몸을 낮춰 진흙을 보았다. 손가락으로 찍어 문질러 보더니 말했다.

“새거야.”

백승호가 급히 말했다.

“저택이 낡아서… 하인들이 낮에 오가며 묻혔을 수도 있습니다.”

“하인은 오늘 오후에 다 내려갔다며.”

“그건…”

백승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미란이 비웃듯 말했다.

“비서님, 오늘따라 말이 자주 막히네.”

백승호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오른손 엄지로 왼쪽 손목 안쪽을 문질렀다. 아주 짧게. 마치 거기에 묻은 무언가를 지우려는 습관적인 동작처럼.

그리고 또 보았다.

한재희가 그 동작을 보고 있었다.

의사의 얼굴에는 놀라움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인식.

무언가를 알아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4. 두 번째 이상한 소리

전화는 죽어 있었다.

강문식은 현관 옆 전화기를 붙잡고 수화기를 여러 번 내려쳤다.

“빌어먹을.”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비와 바람은 더 거세졌다. 산길은 끊겼고, 차로 내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는 아침까지 해운당에 있어야 했다.

죽은 사람과 함께.

강문식은 모두를 응접실에 모았다.

“경찰이 올 때까지 아무도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 어디 있었는지 말해.”

정미란이 팔짱을 꼈다.

“식당에 있었지. 다 같이.”

“윤태오가 나간 뒤?”

“계속.”

“화장실 간 사람?”

침묵.

백승호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는… 잠깐 나갔습니다.”

강문식의 눈이 번뜩였다.

“언제?”

“윤 회장님이 서재로 올라가신 지 십 분쯤 뒤요.”

“어디로?”

“주방에… 물을 가지러.”

“왜 말 안 했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강문식이 한 걸음 다가섰다.

“사람이 죽었는데 뭐가 중요하고 안 중요해?”

백승호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저는 정말 주방에만 갔습니다.”

나는 그를 관찰했다. 그의 손가락은 서로를 꽉 붙들고 있었다. 손톱이 살을 누르고 있었다. 눈동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피해 바닥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그의 공포에는 이상한 결이 있었다. 살인자가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파국이 마침내 문을 두드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강문식은 오세린을 향했다.

“당신은?”

“저는 식당에 있었어요.”

“비명은?”

오세린의 얼굴이 굳었다.

“저도 들었어요.”

“당신 목소리 같았어.”

“저 아니에요.”

“누가 흉내 냈다는 건가?”

“모르겠어요.”

그녀는 정말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의 오른손은 계속 목걸이 팬던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은으로 된 작은 바이올린 모양 팬던트. 엄지와 검지가 그것을 비틀고, 놓고, 다시 쥐었다.

나는 물었다.

“녹음된 소리일 가능성은요?”

강문식이 나를 보았다.

“뭐?”

“비명이 위층에서 들렸지만 오세린 씨는 아래층에 있었습니다. 누군가 녹음된 소리를 틀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오세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작게.

강문식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당신, 뭔가 알아?”

“아니요.”

“지금 표정은 아닌데.”

“정말 몰라요.”

그때, 응접실 밖 복도에서 소리가 났다.

스윽.

무언가가 바닥을 끄는 소리.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촛불 몇 개가 벽에 걸려 있었지만, 바람이 들어오는지 불꽃이 자꾸 몸을 뒤틀었다.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스윽.

또다시 소리.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정미란이 낮게 속삭였다.

“뭐야?”

강문식이 촛대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구두 밑창이 마룻바닥을 살짝 누를 때마다 삐걱,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문틀에 다가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홱,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복도 끝, 계단 앞에 검은 물체가 놓여 있었다.

젖은 우비였다.

우비는 방금 벗어 던진 것처럼 축축했다. 검은 고무 표면 위로 빗물이 흘러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바닥에는 붉은 진흙이 묻어 있었다.

강문식이 이를 악물었다.

“누가 밖에 나갔다 왔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우비의 소매를 보았다.

왼쪽 소매 끝이 안쪽으로 말려 있었다.

누군가 우비를 급히 벗으며 손을 빼낸 흔적. 손목 안쪽이 젖지 않게 조심한 듯한 모양.

나는 자연스럽게 백승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5. 범인의 손

우비는 해운당 현관 옆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오래된 검은 우비. 낮에 내가 들어올 때도 보았다. 그때는 분명 현관 옷걸이에 있었다. 지금은 복도 끝에 놓여 있었다.

강문식은 모두의 신발을 확인했다.

정미란의 구두는 깨끗했다. 오세린의 낮은 굽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한재희의 신발에는 먼지만 있었고, 내 신발은 마른 흙이 묻어 있었으나 비에 젖은 새 진흙은 없었다.

백승호의 신발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했다.

강문식이 말했다.

“신발 닦았나?”

백승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요.”

“그럼 왜 당신 신발만 방금 닦은 것처럼 광이 나?”

“습관입니다. 저는 늘…”

“지금 장난해?”

백승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갑자기 억울함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아무도 그에게 직접 살인자라고 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응접실의 공기를 얼려 버렸다.

정미란이 작게 웃었다.

“아이고, 자백 비슷한데?”

백승호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처음으로 비서의 얼굴에서 순종이 사라졌다.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 있습니까?”

정미란의 얼굴이 굳었다.

“뭐?”

“회장님 유언장 때문에 여기 온 거잖아요. 당신 빚이 얼마인지 회장님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입 닥쳐.”

“못 닥칩니다.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강문식이 끼어들었다.

“무슨 뜻이야?”

백승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때 한재희가 조용히 말했다.

“백 비서님 손목을 보여주세요.”

모두가 한재희를 보았다.

백승호가 얼어붙었다.

“왜요?”

“왼쪽 손목 안쪽이요.”

“싫습니다.”

강문식이 그에게 다가갔다.

“보여줘.”

“싫다고 했습니다.”

강문식이 백승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백승호가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의자가 뒤집히고 촛불이 흔들렸다. 그의 움직임은 절박했다. 팔꿈치로 강문식의 가슴을 밀치고, 어깨를 비틀고, 몸을 낮춰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전직 형사의 손아귀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강문식이 그의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 안쪽에는 검푸른 멍이 있었다.

그리고 멍 중앙에는 얇고 붉은 상처가 있었다.

마치 가느다란 철사에 긁힌 흔적.

한재희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역시…”

강문식이 물었다.

“이게 뭔데?”

한재희는 백승호를 보며 말했다.

“며칠 전 윤태오 씨가 제게 연락했습니다. 백 비서님이 자꾸 왼쪽 손목을 숨긴다며, 약물 중독이 아닌지 봐달라고 했어요.”

백승호가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목 안에서 찢어진 숨소리였다.

“그 인간답군요. 죽어서도 사람을 더럽게 만드네요.”

“그 상처는 주사 자국이 아닙니다.”

한재희가 말했다.

“오히려… 줄이나 와이어에 쓸린 흔적 같아요.”

와이어.

그 단어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나는 윤태오의 손바닥 상처를 떠올렸다. 종이에 베인 듯 얇은 상처. 손톱 밑의 검은 가루. 금고 다이얼의 피 묻은 손가락 자국.

그리고 우비의 젖은 소매.

그러나 퍼즐은 아직 맞지 않았다.

강문식이 백승호를 벽으로 밀었다.

“네가 밖에 나갔지?”

백승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비 입고 나갔다 왔지?”

침묵.

“왜?”

백승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창밖의 비를 보았다. 검은 유리에는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보다 유령에 가까웠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묻으려고 했습니다.”

정미란이 속삭였다.

“뭘?”

백승호가 눈을 감았다.

“녹음기요.”

6. 녹음기

우리는 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비는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바람은 우산을 펼칠 틈도 주지 않았다. 해운당 뒤편에는 오래된 장독대와 무너진 창고가 있었다. 그 사이 작은 배수로가 산 아래로 이어졌다.

백승호는 그곳을 가리켰다.

“저기입니다.”

강문식이 손전등을 켰다. 빛줄기가 빗속을 갈랐다. 흙탕물이 흐르는 배수로 안쪽, 낙엽과 진흙 사이에 작은 검은 물체가 반쯤 묻혀 있었다.

녹음기였다.

오래된 휴대용 녹음기. 방수 비닐에 감싸져 있었지만, 급하게 버린 탓인지 한쪽이 찢어져 있었다.

강문식이 그것을 꺼냈다.

“네가 비명 소리를 틀었나?”

백승호가 고개를 숙였다.

“네.”

“왜?”

“윤 회장님 지시였습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백승호는 빗속에서 떨고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턱끝으로 떨어졌다. 그는 한 번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회장님은 오늘 밤 누군가를 시험하려 했습니다. 유언장 이야기도 거짓말이었습니다. 진짜 유언장은 없었어요. 그냥… 우리 반응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정미란이 이를 악물었다.

“그 미친놈이.”

백승호는 계속했다.

“회장님이 서재로 올라가면 제가 식당에서 빠져나와 위층 복도에 녹음기를 숨기고 비명 소리를 틀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모두 놀라서 서재로 올라오겠죠. 그때 회장님은 죽은 척하고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강문식이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 연극이었다?”

“네. 회장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누가 가장 기뻐하는지.”

나는 소름이 돋았다.

윤태오는 자신의 죽음을 미끼로 삼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에게 인간은 끝까지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서재에 올라갔을 때는 정말 죽어 있었다?”

백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녹음기를 작동시키고 바로 주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일이 진짜가 되어 버렸어요. 무서워서… 녹음기를 버리러 나갔습니다. 제가 범인으로 몰릴까 봐.”

강문식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래서 증거를 없애려 했다고?”

“살인은 안 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백승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제가 죽일 거였으면 그런 멍청한 짓을 했겠습니까? 제가 설치한 녹음기가 왜 저한테 불리한 증거인데요!”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살인자들은 때때로 멍청한 짓도 한다.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해운당 안은 바깥보다 더 차가웠다. 젖은 옷에서 물이 떨어져 복도에 검은 점을 만들었다.

녹음기를 재생하자, 오세린의 비명과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세린은 귀를 막았다.

“그거… 제 목소리예요.”

백승호가 말했다.

“회장님이 예전에 공연 리허설 영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따온 거라고 했습니다.”

오세린의 얼굴에 모욕감이 번졌다.

“그 사람은 정말…”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 순간, 위층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쿵.

아주 무거운 것이 쓰러지는 소리.

이번에는 녹음기가 아니었다.

7. 사라진 시신

우리는 다시 위층으로 뛰어올랐다.

서재 문은 닫혀 있었다.

아까 분명 열어 두었던 문이었다.

강문식이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잠겨 있었다.

“이런…”

그가 어깨로 문을 밀었다. 낡은 문이 한 번 흔들렸다. 두 번째 충격에 문틀이 비명을 질렀다. 세 번째에 문이 안쪽으로 터져 나갔다.

서재 안은 어두웠다.

스탠드가 꺼져 있었다.

강문식이 손전등을 비췄다.

카펫.

책상.

금고.

벽난로.

그리고 바닥.

윤태오의 시신이 사라져 있었다.

정미란이 짧게 비명을 삼켰다.

“어디 갔어?”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책장도 그대로였다. 금고 역시 닫힌 채였다. 우리가 방을 비운 시간은 고작 십여 분. 그 사이 시신이 사라졌다.

나는 등골을 타고 차가운 것이 내려가는 걸 느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갔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옮겼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강문식은 바닥을 비추었다.

카펫 위에는 길게 끌린 자국이 있었다. 붉은 재킷에서 떨어진 듯한 섬유 조각이 문턱 근처에 남아 있었다. 문은 안쪽에서 잠겼다. 창문도 닫혔다.

“비밀 통로가 있나?”

정미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집엔 그런 거 없어.”

“확실해?”

“내가 어릴 때 여기 자주 왔어. 없어.”

나는 서재를 다시 보았다.

책장. 금고. 벽난로. 창문. 책상.

그리고 카펫.

윤태오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는 희미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피는 아니었다.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 코냑도 아니었다. 냄새가 없었다.

“잠깐.”

나는 몸을 낮췄다. 손끝으로 얼룩을 아주 조금 찍어 보았다. 끈적했다.

“접착제?”

한재희가 다가왔다.

“접착제라기보다는… 송진 같네요.”

송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세린이 굳어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송진은 낯선 것이 아니다. 활에 바르는 물질. 그러나 여기서 왜?

오세린이 말했다.

“저 아니에요.”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 말이 또 한 번 방 안을 얼렸다.

강문식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왜 그런 말을 했지?”

“모두 절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럴 만하잖아. 송진이라니.”

“바이올린 하는 사람이 세상에 저 하나예요?”

“이 집 안에서는 당신 하나지.”

오세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꽉 물었다. 분노가 공포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제 인생을 망쳤다고 해서 제가 죽였다는 건가요?”

“망쳤나?”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제 손을 망쳤어요.”

오세린은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우리는 그제야 그녀가 만찬 내내 얇은 살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녀의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오래된 흉터가 손등을 가로질렀다. 마치 날카로운 유리가 찢고 지나간 흔적.

“3년 전 사고였어요. 윤태오가 운전했죠. 술에 취했는데도 운전대를 잡았어요. 사고가 나자 그는 운전자를 저로 꾸몄어요. 저는 후원도, 연주 기회도, 손도 잃었어요.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요.”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태오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은, 누가 죽였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때 한재희가 책상 아래를 보다가 말했다.

“여기… 뭔가 있어요.”

책상 뒤쪽, 벽과 바닥이 만나는 구석에 작은 금속 고리가 있었다. 평소에는 카펫에 가려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강문식이 고리를 잡아당겼다.

딸깍.

바닥 일부가 미세하게 들렸다.

정미란의 얼굴이 변했다.

“말도 안 돼.”

비밀 통로는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있었다.

8. 바닥 아래

바닥문 아래에는 좁은 계단이 있었다.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검은 입처럼 올라왔다. 손전등 빛이 아래로 내려갔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해운당은 단순한 별장이 아니었다. 산허리에 세워진 오래된 집답게, 지하 저장고와 대피 통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강문식이 먼저 내려갔다.

“다들 여기 있어.”

하지만 아무도 혼자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한 줄로 계단을 내려갔다. 발밑의 나무 계단은 축축했고, 밟을 때마다 물 먹은 뼈처럼 물렁하게 삐걱거렸다.

아래는 낮고 긴 통로였다.

벽은 돌로 되어 있었고,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똑. 똑. 똑. 위층 처마에서 듣던 소리와 같았지만, 지하에서 들으니 훨씬 가까웠다. 마치 어둠 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혀끝으로 시간을 세고 있는 듯했다.

통로 중간에는 끌린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무거운 것을 끌고 지나간 흔적. 진흙과 먼지가 섞여 길게 문질러져 있었다. 곳곳에 와인색 섬유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갔다.

통로 끝은 오래된 저장고로 이어졌다. 나무 선반에는 빈 술병과 썩은 상자가 쌓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녹슨 쇠난로가 있었고, 그 옆에 윤태오의 시신이 있었다.

그는 등을 벽에 기대고 앉은 자세였다.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눈은 뜬 채였다. 손전등 빛이 닿자 그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번뜩였다. 죽은 사람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런데도 마주치면 항상 내가 들킨 것처럼 느껴진다.

오세린이 뒤돌아섰다.

정미란은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강문식은 시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옮긴 지 얼마 안 됐어.”

나는 저장고 안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구두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크고 무거웠다. 강문식의 것일 가능성이 있었다. 또 하나는 작고 얇았다. 여성용 구두 자국처럼 보였다. 하지만 습기 때문에 선명하지 않았다.

시신 옆에는 한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바이올린 활.

낡고 검은 활이었다. 활털 일부가 끊어져 있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송진 가루가 묻어 있었다.

오세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거 아니에요.”

강문식이 활을 집어 들었다.

“이 집에 바이올린 활이 또 있나?”

정미란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백승호가 말했다.

“윤 회장님이 오래된 악기를 수집했습니다. 서재 옆 작은 전시실에 바이올린도 있었어요.”

강문식이 오세린을 노려보았다.

“당신한테 점점 불리해지네.”

오세린은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네요. 누군가 아주 열심히 그렇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 말은 맞았다.

너무 많은 증거가 오세린을 가리켰다. 비명소리, 송진, 바이올린 활. 그러나 너무 노골적이었다. 진짜 범인은 흔적을 남기지만, 영리한 범인은 흔적을 ‘보이게’ 남긴다.

나는 윤태오의 손을 다시 보았다.

오른손 손톱 밑의 검은 가루.

그것은 송진이 아니었다. 송진은 보통 노랗거나 갈색빛을 띤다. 검은 가루라면…

“숯?”

나는 중얼거렸다.

한재희가 나를 보았다.

“뭐라고요?”

“벽난로. 서재의 벽난로는 꺼져 있었죠. 그런데 윤태오의 손톱 밑에는 검은 가루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벽난로나 그 주변을 긁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강문식이 말했다.

“왜?”

“무언가를 남기려고.”

나는 시신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손가락은 굳어 있었지만 완전히 경직되진 않았다. 검지 손톱 아래에 검은 가루가 끼어 있었다. 손가락 끝에는 미세한 나무 가시도 박혀 있었다.

나무.

금고 다이얼이 아니라.

책장?

벽난로 장식?

혹은 바닥문?

나는 다시 서재를 떠올렸다. 윤태오가 쓰러진 위치. 오른손이 향한 방향. 손끝에서 떨어져 있던 은색 열쇠. 그리고 피 묻은 금고 다이얼.

“피 묻은 금고 다이얼은 가짜 단서일 수도 있습니다.”

강문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윤태오는 죽기 직전 금고를 열려 한 게 아닐 수 있어요. 누군가 그의 피를 묻혀 금고에 찍어 놓은 거죠. 유언장을 둘러싼 살인처럼 보이게 하려고.”

백승호가 낮게 말했다.

“그럼 진짜 이유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짜 이유는 아직 어둠 속에 있었다.

그때, 저장고 안쪽 어둠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딸깍.

모두가 숨을 멈췄다.

손전등 빛을 돌리자, 썩은 상자 더미 뒤쪽에 또 다른 문이 보였다.

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방금 누군가 그 너머에서 닫으려다 멈춘 것처럼.

강문식이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대답은 없었다.

그는 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들이쳤다. 그 문은 해운당 뒤편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비바람이 안으로 몰려들었다.

문밖의 진흙 위에 발자국이 있었다.

작고 얇은 발자국.

그리고 그 옆에, 지팡이를 짚은 듯한 둥근 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있었다.

나는 그 자국을 보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집에 지팡이를 짚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움직임을 하는 사람은 있었다.

오세린.

오른손이 불편한 그녀는 무언가를 잡을 때 손목을 보조하듯 팔 전체를 움직였다. 바이올린 활도 예전처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둥근 자국은 지팡이가 아니었다.

우산 끝이었다.

젖은 우비.

깨끗한 신발.

왼쪽 손목의 와이어 자국.

비밀 통로.

우산 끝.

이 모든 것은 백승호와 오세린을 번갈아 가리켰다.

너무 번갈아.

마치 범인이 일부러 우리의 시선을 좌우로 흔들고 있는 것처럼.

9. 죽은 아내

우리는 다시 응접실에 모였다.

시신은 지하 저장고에 그대로 두었다. 문은 강문식이 의자로 막아 두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피로와 공포가 눌어붙어 있었다.

한재희는 창가에 서 있었다. 빗물이 유리를 타고 흘렀고, 그 너머의 숲은 검은 장막 같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윤태오의 아내를 상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그 얘기가 왜 지금 나오죠?”

“이 사건의 동기가 유언장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한재희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분은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자살이었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윤태오의 아내, 이서연.

나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명 화가였다. 결혼 후 활동이 뜸해졌고, 어느 날 해운당 근처 계곡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보도는 짧았다. 우울증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 남편 윤태오는 슬픔에 잠긴 미망인… 아니, 남편으로 언론 앞에 섰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걸 절제라고 불렀다.

한재희가 천천히 말했다.

“서연 씨는 죽기 전 제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자신의 그림을 훔쳐 팔고 있다고. 하지만 증거가 없었어요.”

“윤태오가 죽였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죠.”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요?”

“윤태오가 연락했습니다. 서연 씨의 마지막 녹음 파일을 갖고 있다고 했어요. 제 의료기록이 문제 될 수도 있다고 협박했습니다.”

“녹음 파일?”

“상담 중 녹음된 게 아니라, 서연 씨가 죽기 전 남긴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백승호가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서재 금고 안에 있습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뭐가?”

“서연 사모님의 녹음 파일이요. 회장님이 가끔 들었습니다. 술에 취하면.”

정미란이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걸 왜 들어?”

백승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이겼다는 걸 확인하려고요.”

오세린이 속삭였다.

“괴물…”

한재희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날것의 분노가 아니었다. 오래 눌러 말라붙은 분노. 너무 오래 품어 오히려 차가워진 감정.

나는 물었다.

“금고 암호를 아는 사람은 윤태오뿐이라고 했죠?”

백승호가 잠시 망설였다.

“겉으로는요.”

“실제로는?”

“저도 압니다.”

정미란이 날카롭게 말했다.

“뭐?”

“비서니까요. 회장님은 술 취하면 늘 까먹었습니다. 결국 제가 관리했습니다.”

강문식이 말했다.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

“말하면 제가 더 의심받으니까요.”

강문식은 그를 한참 노려보다가 말했다.

“암호가 뭐야?”

백승호는 숫자를 말했다.

그 숫자를 듣는 순간, 한재희가 눈을 감았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암호는 여섯 자리였다.

102713

10월 27일 13시.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숫자.

하지만 한재희에게는 아니었다.

“그 날짜가 뭡니까?”

내가 묻자 한재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서연 씨가 마지막으로 제게 예약했던 시간입니다. 오지 못했어요. 그날 죽었으니까.”

윤태오는 아내가 죽은 시간을 금고 암호로 삼았다.

방 안의 누구도 바로 말하지 못했다.

어떤 잔혹함은 너무 차가워서, 분노보다 먼저 멀미를 부른다.

10. 금고 안의 것

우리는 다시 서재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모두 함께였다. 강문식은 백승호에게 암호를 누르게 했다. 백승호의 손가락은 떨렸다. 다이얼이 돌아갈 때마다 금속성 마찰음이 작게 울렸다.

딸깍.

금고 문이 열렸다.

안에는 서류 봉투 몇 개, 외장 하드, 낡은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작은 검은 수첩이 있었다.

강문식이 수첩을 펼쳤다.

그 안에는 이름과 금액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불법 미술품 거래, 뇌물, 협박 내용으로 보이는 메모. 윤태오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모아 둔 약점의 목록이었다.

정미란의 이름도 있었다.

백승호의 이름도.

오세린의 사고 기록도.

한재희의 상담 기록 관련 메모도 있었다.

그리고 강문식의 이름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강문식 — 7년 전 자료 조작 건. 원본 보관.”

강문식의 얼굴이 굳었다.

“이 새끼가…”

그는 수첩을 덮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모두가 보았다.

나는 카세트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라벨에는 희미한 글씨가 있었다.

서연 / 마지막

응접실에 있던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져왔다. 테이프를 넣자, 지직거리는 잡음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

얇고 지친 목소리였다.

“재희 선생님… 제가 이걸 남기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한재희의 얼굴이 무너졌다.

테이프 속 이서연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배경에는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물 떨어지는 소리. 똑, 똑, 똑.

“태오가 제 그림을 팔았어요. 제 이름으로 위조 계약서도 만들었고요. 제가 말하면… 저를 미친 사람으로 만들겠대요.”

잠시 잡음.

그리고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고 선명했다.

“서연아, 문 열어.”

윤태오의 목소리였다.

테이프 속 이서연이 숨을 삼켰다.

“그가 왔어요. 만약 제가 죽으면… 저는 스스로 죽은 게 아니에요.”

그 말 뒤로 큰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 몸싸움 소리. 여자의 짧은 비명. 그리고 테이프는 끊겼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와 바람이 집 전체를 흔들었다. 촛불은 길게 휘었다. 마치 방 안의 공기마저 그 녹음을 듣고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한재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제가… 그때 더 했어야 했어요.”

나는 말했다.

“윤태오는 이 테이프로 당신을 협박했군요.”

“네. 제가 그걸 신고하지 않은 걸 문제 삼겠다고 했어요. 제가 환자의 말을 무시했다고, 방치했다고… 사실 일부는 맞아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하지만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그러나 진심처럼 들리는 말은, 언제나 가장 위험하다.

11. 세 개의 살인 계획

나는 서재 한가운데 서 있었다.

사건은 하나처럼 보였지만, 사실 세 겹이었다.

첫째, 윤태오의 장난. 죽은 척 연극을 꾸미기 위해 백승호에게 녹음기를 설치하게 했다.

둘째, 진짜 살인. 윤태오는 독으로 죽었다.

셋째, 시신 이동과 증거 조작. 누군가 시신을 비밀 통로로 옮기고, 오세린을 범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것이 한 사람의 계획인가, 여러 사람의 계획이 겹친 것인가였다.

나는 모두를 보았다.

백승호는 윤태오의 연극에 가담했고, 녹음기를 숨기려 했다.

오세린은 명백한 원한이 있었고, 송진과 활이 그녀를 가리켰다.

한재희는 이서연의 죽음에 죄책감과 분노를 품고 있었고, 금고 암호를 듣고 반응했다.

정미란은 돈 때문에 윤태오와 싸웠고, 해운당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강문식은 윤태오에게 약점을 잡혀 있었고, 사건 현장을 가장 자유롭게 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

나는 모두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이곳에 초대된 이유일지도 몰랐다. 윤태오는 자신의 죽음 연극에 추리소설 작가를 불러 넣었다. 관객이자 기록자.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영리한지 누군가 알아봐 주길 바랐을 것이다.

나는 벽난로 앞에 섰다.

벽난로는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 재가 얇게 쌓여 있었다. 하지만 안쪽 왼편, 검게 탄 벽돌 위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세로로 두 번, 가로로 한 번.

마치 글자를 쓰려다 실패한 흔적.

나는 손전등을 가까이 비췄다.

자국 옆에 아주 작은 흰색 섬유가 붙어 있었다.

장갑의 실밥?

오세린의 장갑은 살색이었다. 정미란은 장갑을 끼지 않았다. 백승호의 셔츠는 흰색이었다. 한재희의 블라우스도 흰색. 강문식의 셔츠도 흰색.

너무 많았다.

나는 책상으로 갔다.

코냑 잔. 병. 스탠드. 종이칼. 편지지.

종이칼 끝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편지지 한 장은 반쯤 접혀 있었다. 펼쳐 보니 빈 종이였다. 하지만 종이 위에는 압흔이 있었다. 이전 장에 무언가를 썼고, 그 흔적이 남은 것이다.

연필을 가져와 가볍게 문질렀다.

글자가 떠올랐다.

“오늘 밤, 누가 나를 가장 원망하는지 보겠다.”

윤태오의 글씨였다.

그 밑에 더 희미한 줄이 있었다.

“서연의 테이프를 들려주면 재희는 무너질 것이다.”

한재희의 이름.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백승호가 갑자기 말했다.

“저는 회장님이 오늘 밤 한 선생님을 망가뜨리려 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한재희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회장님은 선생님 면허를 빼앗을 생각이었습니다. 테이프와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했어요. 오세린 씨 사고 자료도, 강문식 씨 자료도, 정미란 씨 빚도 전부요.”

정미란이 소리쳤다.

“그럼 너는 왜 가만있었어?”

백승호가 지친 얼굴로 웃었다.

“제가 뭘 할 수 있었는데요? 저는 그 사람 밑에서 9년을 살았습니다. 숨 쉬는 법까지 허락받고 살았다고요.”

그는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사람이 무서워하는 걸 봤습니다.”

강문식이 물었다.

“언제?”

“저녁 전에요. 회장님이 서재에서 누군가와 통화했습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어요. 회장님이 말했습니다. ‘그건 네가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그리고… 웃지 않았습니다.”

“상대는?”

“모릅니다.”

나는 물었다.

“그 후에 누가 서재에 들어갔습니까?”

백승호는 잠시 생각했다.

“정미란 씨가 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정미란에게 향했다.

정미란이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냥 얘기하러 간 거야.”

“무슨 얘기?”

“돈.”

그녀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나 빚 있어. 태오가 내 지분을 헐값에 빼앗으려 했고, 나는 돈이 필요했어. 그래서 싸웠어. 하지만 그때 그 인간은 멀쩡히 살아 있었어.”

“서재에서 뭘 만졌나?”

“아무것도.”

나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손톱이 짧았다. 손가락 마디에는 검은 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벽난로를 만졌습니까?”

정미란이 흠칫했다.

“…담배 피우려고 성냥을 찾았어. 벽난로 선반 위에 있길래.”

“그때 윤태오는?”

“책상에 앉아 있었어. 코냑을 마시고 있었고.”

“잔은 하나였습니까?”

정미란은 눈을 피했다.

“두 개였던 것 같아.”

“당신도 마셨습니까?”

“아니.”

너무 빠른 대답.

강문식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미란 씨.”

“왜.”

“당신 가방 좀 봐야겠어.”

“영장 있어?”

“사람 죽었어.”

정미란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가방을 던지듯 내밀었다.

강문식이 내용물을 꺼냈다. 지갑, 담배, 라이터, 립스틱, 약통, 손수건.

약통.

한재희가 약통을 보는 순간 표정이 변했다.

강문식이 물었다.

“이 약 뭐야?”

정미란이 말했다.

“수면제.”

한재희가 약통을 받아 확인했다.

“수면제가 아닙니다.”

정미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뭐?”

“심장 질환 환자에게 위험할 수 있는 약이에요. 과량 복용하면 부정맥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강문식이 정미란을 붙잡았다.

“설명해.”

정미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갑자기 웃었다.

작고 마른 웃음.

“그래. 내가 넣었어.”

모두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죽이려고 한 건 아니야.”

강문식이 거칠게 말했다.

“독을 술에 넣고 죽이려 한 게 아니라고?”

“태오는 심장이 안 좋았어. 나는 그걸 알고 있었고. 조금만 먹이면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 사이 금고에서 지분 계약서를 꺼내려고 했어.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게 살인미수야.”

“그런데 나는 그가 죽기 전에 나왔어! 그리고 그가 마신 양도 많지 않았어.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고!”

한재희가 차갑게 말했다.

“그건 당신 판단이 아닙니다.”

정미란은 무너졌다.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우리는 범인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정미란은 약을 넣었다. 그러나 윤태오의 죽음이 그것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시신을 옮기고 오세린에게 누명을 씌운 행위는 정미란의 즉흥성과 맞지 않았다.

진짜 범인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12. 범인의 모션

범인은 그날 밤 내내 우리 앞에서 연기했다.

그 사람은 두려워하는 척할 때 어깨를 먼저 움츠리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놀라면 목과 어깨가 동시에 굳는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얼굴부터 만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벌리고, 그다음 한 박자 늦게 어깨를 떨었다. 감정이 몸에서 얼굴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서 몸으로 내려갔다.

그 사람은 거짓말할 때 상대를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너무 정확한 타이밍에 시선을 피했다. 질문이 끝나기 직전, 대답을 준비하는 짧은 틈에 눈동자가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엄지손가락으로 검지 첫마디를 천천히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마치 보이지 않는 먼지를 닦듯.

그 사람은 무언가를 숨길 때 몸 전체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한 부분만 과도하게 가렸다. 손목, 주머니, 가방, 혹은 자기 앞의 작은 공간. 사람은 죄를 숨길 때 마음을 가리려 하지만, 몸은 증거가 있는 곳을 가린다.

나는 그 움직임들을 떠올렸다.

백승호의 손목.

오세린의 팬던트.

정미란의 가방.

강문식의 수첩.

한재희의 눈.

누가 가장 많이 자기 몸을 통제했는가?

한재희였다.

그녀는 시신을 처음 봤을 때 뒤로 물러났지만, 너무 정확히 한 걸음이었다. 두려움에 밀려난 사람이 아니라, 적절한 반응의 거리를 계산한 사람처럼. 백승호의 손목을 지적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금고 암호를 들었을 때만 눈을 감았다. 그것은 놀람이 아니라 기억을 눌러 닫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범인이라면 왜 정미란의 약을 드러냈을까?

답은 간단했다.

정미란의 약은 진짜였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한재희는 그것을 이용했다. 정미란이 윤태오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짐작했다. 그래서 윤태오가 쓰러지면 모두 정미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살해 방법은?

독.

정미란의 약이 아니라 다른 독.

나는 코냑 잔을 다시 떠올렸다. 잔의 작은 흠집. 윤태오의 손바닥 상처. 얇은 상처. 와이어 자국. 송진. 바이올린 활.

갑자기 모든 것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바이올린 활이 아니었어요.”

내가 말했다.

모두가 나를 보았다.

“그건 흉기가 아니라 운반 도구였습니다.”

강문식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윤태오는 독이 든 술을 마신 게 아닙니다. 적어도 주된 독은 술이 아니었을 수 있어요. 그는 손바닥의 상처를 통해 독에 노출됐습니다.”

한재희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정말 미세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서재 금고의 열쇠. 은색 열쇠에 뭔가 발라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윤태오는 열쇠를 만졌고, 손바닥에 난 미세한 상처로 독이 들어갔죠.”

백승호가 말했다.

“하지만 열쇠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열쇠를 조작하려면 장갑이 필요했겠죠. 혹은 손잡이가 긴 무언가.”

나는 바이올린 활을 보았다.

“활털에 송진처럼 보이게 독성 물질을 묻히고, 그것으로 열쇠 손잡이나 금고 다이얼 일부에 바르는 겁니다. 가까이 손대지 않고도요.”

오세린이 숨을 삼켰다.

“그래서 제게 누명을…”

“네. 송진과 활은 오세린 씨를 가리키도록 놓인 겁니다.”

강문식이 한재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사라면 그런 독을 알 수 있겠군.”

한재희는 조용했다.

나는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신 이동은 힘이 필요합니다. 한재희 씨 혼자 윤태오를 지하로 옮기기는 어렵죠.”

한재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 범행은 불가능하겠네요.”

“혼자라면요.”

방 안의 공기가 갈라졌다.

나는 강문식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

“강문식 씨.”

그가 낮게 말했다.

“말 조심해.”

“당신은 사건 현장을 가장 먼저 통제했습니다. 모두 움직이지 말라고 했고, 시신과 방 안 물건을 확인했습니다. 그때 금고 다이얼의 피 묻은 자국을 만들 수도 있었고, 시신 상태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웃기지 마.”

“지하 통로를 발견한 뒤에도 당신이 앞장섰습니다. 저장고 문을 열었고, 활을 집어 들었습니다. 증거를 발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의심받지 않죠.”

강문식의 손이 천천히 주먹이 되었다.

그 동작은 매우 느렸다.

엄지부터 접혔다. 그다음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려 했지만, 주먹을 만드는 순서가 지나치게 의식적이었다. 폭발하는 분노가 아니라, 분노를 연기하기 위해 손을 조립하는 사람의 움직임.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윤태오가 당신의 자료를 갖고 있었죠. 7년 전 자료 조작 건. 그게 공개되면 당신은 끝장이었을 겁니다.”

강문식이 웃었다.

“그래서 내가 죽였다고?”

“당신 혼자였다면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재희 씨가 독을 알고 있었고, 당신은 시신과 현장을 다룰 줄 알았죠.”

한재희가 말했다.

“상상력이 지나치시네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실수했습니다.”

나는 벽난로를 가리켰다.

“윤태오는 죽기 직전 벽난로 안쪽을 긁었습니다. 왜일까요? 손톱 밑의 검은 가루는 벽난로 재였습니다. 그는 글자를 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 완성하지 못했죠.”

강문식이 말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그 자국은 세로 두 줄과 가로 한 줄이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려 보였다.

두 개의 세로선.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선.

“처음에는 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표시였어요. 윤태오는 죽기 직전 자신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 쓰지 못했습니다. 대신 마지막으로 본 것을 남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것?”

“손.”

나는 강문식의 손을 보았다.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형사 시절 칼에 베였다는 이야기를 저녁 때 했었다. 그 흉터 때문에 그는 담배를 잡을 때 항상 검지와 중지를 벌리지 않고 붙여 잡았다.

하지만 벽난로의 자국은 두 손가락을 나란히 대고 긁은 형태였다.

한재희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 오세린은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정미란의 손톱은 짧지만 두 손가락으로 그런 압력을 내기 어렵다. 백승호는 왼손목에 상처가 있었고 오른손잡이다.

강문식은 현장을 살피며 벽난로 안쪽을 만졌다. 그때 손가락 두 개를 넣어 자국을 지우려 했지만, 오히려 남겼다.

“당신이 벽난로 자국을 덮으려다 실패한 겁니다.”

강문식의 눈빛이 변했다.

아주 잠깐, 그의 얼굴에서 형사의 껍질이 벗겨졌다. 그 안쪽에 있던 것은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계산.

그는 방 안의 위치를 재고 있었다.

문까지의 거리. 촛대. 내 위치. 백승호의 약한 몸. 오세린의 불편한 손. 정미란의 흐트러진 자세. 한재희의 침묵.

범인의 모션은 그 순간 가장 선명했다.

강문식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턱을 당겨 목을 보호하고, 어깨를 낮춰 몸의 중심을 앞으로 실었다. 오른발이 반 발 뒤로 빠졌다. 도망치려는 자세가 아니라 달려들 준비였다. 손은 주먹이 아니라 반쯤 펼쳐져 있었다. 잡고, 밀치고, 무기를 빼앗기 위한 손.

그는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한재희가 말했다.

“그만하세요, 강 형사님.”

그 말투는 공범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한재희에게 꽂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끝났어요.”

13. 공범

한재희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손끝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고요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강문식이 으르렁거렸다.

“입 닥쳐.”

한재희는 그를 보지 않았다.

“윤태오는 오늘 밤 우리 모두를 망가뜨리려 했어요. 서연 씨의 테이프를 공개하고, 제 기록을 조작해 제가 환자를 방치한 것처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강 형사님 자료도 마찬가지였죠.”

강문식이 이를 갈았다.

“조작이 아니야.”

한재희가 처음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요. 당신은 정말 자료를 조작했죠. 윤태오를 잡으려고. 하지만 그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다쳤고, 당신은 쫓겨났어요. 윤태오는 그 원본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미란이 속삭였다.

“둘이 짠 거야?”

한재희는 대답했다.

“처음엔 아니었습니다. 저는 윤태오를 겁주려고 했어요. 그가 만지는 열쇠에 약물을 발랐습니다. 치명량은 아니었어요. 손에 상처가 없다면 피부로 거의 흡수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쓰러지면 금고를 열어 테이프를 가져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정미란 씨가 약을 술에 넣었죠.”

내가 말했다.

한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밖이었습니다. 두 약물이 겹치면서 상황이 달라졌어요.”

강문식이 말했다.

“헛소리야.”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윤태오가 쓰러진 뒤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봤습니다. 전직 형사라 맥박을 확인했겠죠. 그리고 선택했습니다.”

강문식은 입을 다물었다.

한재희가 대신 말했다.

“그는 숨이 붙어 있었어요.”

정미란이 입을 막았다.

“세상에…”

한재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윤태오가 제 손목을 붙잡았습니다. 아주 약하게요. 그리고 웃었습니다. 그 상태에서도 웃었어요. ‘너도 똑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강문식이 그때 들어왔다.

백승호가 녹음기를 틀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 혹은 그 직후. 강문식은 윤태오의 연극을 눈치챘거나, 어쩌면 그저 서재로 올라가 윤태오와 담판을 지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쓰러진 윤태오와 한재희를 보았다.

그리고 상황을 이해했다.

윤태오는 아직 살아 있었고, 그가 살아나면 모두 끝이었다. 한재희도, 정미란도, 강문식도. 윤태오는 이 사건마저 이용해 그들을 영원히 지배했을 것이다.

그래서 강문식은 마지막 숨을 끊었다.

방법은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형사였고,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을 알았다. 현장에는 큰 외상이 남지 않았다. 독으로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빠르게 움직였다.

윤태오가 꾸민 녹음기 연극은 오히려 좋은 혼란이었다. 백승호는 겁에 질려 증거를 버릴 것이고, 정미란의 약은 명백한 동기로 남을 것이다. 오세린에게는 송진과 바이올린 활을 이용해 누명을 씌울 수 있었다.

시신을 지하 통로로 옮긴 것도 강문식이었다. 그는 힘이 있었고, 침착했다. 한재희는 그를 막지 않았다. 막지 못했거나, 막고 싶지 않았거나.

“왜 시신을 옮겼습니까?”

내가 묻자 강문식은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 방에는 너무 많은 흔적이 있었어.”

“그래서 더 큰 혼란을 만들었군요. 사라진 시신, 비밀 통로, 숲으로 난 발자국.”

“사람들은 무서워지면 제대로 못 봐.”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공포는 최고의 위장막이지.”

그는 우리를 속이기 위해 유령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죽은 사람이 사라지고, 복도에 젖은 우비가 나타나고, 지하 문이 열려 있고, 숲으로 발자국이 이어지는 장면. 그것들은 모두 공포를 위한 연출이었다.

범인의 모션은 무대감독의 손짓이었다.

그는 우비를 복도에 던질 때 소매를 뒤집어 백승호의 손목 상처와 연결되게 만들었다. 바이올린 활을 시신 옆에 놓을 때 활털을 일부러 비틀어 오세린을 떠올리게 했다. 금고 다이얼에 피를 묻힐 때 윤태오의 손가락을 잡아 눌렀다. 죽은 사람의 손은 무겁고 차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움직임이 눈앞에 그려졌다.

서재의 어둠 속, 강문식은 무릎을 꿇고 윤태오의 손목을 잡는다. 손목이 축 늘어진다. 그는 이를 악물고 죽은 손가락을 금고 다이얼에 문지른다. 피가 얇게 번진다. 손가락이 미끄러지자 그는 손등을 더 세게 누른다. 그리고 주변을 본다. 소리가 들리면 몸을 멈춘다. 숨도 멈춘다. 복도의 삐걱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다시 움직인다.

그는 시신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고 끌어당긴다. 윤태오의 구두 뒤축이 카펫을 긁는다. 무거운 몸이 문턱에 걸리자 그는 짧게 욕을 삼키고, 어깨를 낮춘 뒤 한 번에 힘을 준다. 쿵. 그 소리가 우리가 들은 두 번째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바닥문을 열고 시신을 아래로 밀어 넣는다. 계단에서 시신의 발이 한 번, 두 번, 나무에 부딪힌다. 그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내려간다. 숨이 거칠어진다. 하지만 얼굴은 침착하다. 저장고에 도착해 시신을 벽에 기대 놓고, 바이올린 활을 옆에 둔다. 마지막으로 숲 쪽 문을 조금 열어 두고 발자국을 만든다. 우산 끝으로 둥근 자국을 찍으며, 누군가 밖으로 도망친 것처럼.

그는 공포를 설계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설계도 위를 걸었다.

14. 마지막 새벽

강문식은 달아나려 했다.

그는 갑자기 촛대를 집어 들고 백승호를 밀쳤다. 백승호가 탁자에 부딪혀 쓰러졌다. 오세린이 비명을 질렀다. 강문식은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움직임이 너무 늦었다.

정미란이 바닥에 떨어진 우비를 붙잡아 그의 발에 걸었다. 강문식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촛대가 굴러가며 불꽃이 꺼졌다. 어둠이 방 안을 덮쳤다.

나는 몸을 던져 그의 팔을 눌렀다. 그는 짐승처럼 몸부림쳤다. 어깨가 내 턱을 들이받았고, 입안에 피 맛이 번졌다.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잡으려 올라왔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다. 거칠고 뜨거운 숨이 얼굴에 닿았다.

“비켜!”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순간 오세린이 왼손으로 무거운 장식용 책받침을 들어 그의 손목을 내리쳤다. 강문식의 손이 풀렸다. 한재희가 커튼 끈을 가져와 그의 팔을 묶었다. 그녀의 손은 빠르고 정확했다. 의사로서 붕대를 감던 손놀림과 닮아 있었다.

강문식은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더 이상 우리를 보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비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무렵, 산 아래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끊긴 길을 확인하러 온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경찰을 불렀고, 해운당은 마침내 외부 세계와 연결되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정미란은 약물 투입을 인정했다. 그녀는 살인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그 판단은 법의 몫이었다.

한재희는 열쇠에 약물을 바른 사실을 자백했다. 그녀는 윤태오를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태오가 쓰러진 뒤 신고하지 않았고, 강문식이 현장을 조작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강문식은 끝까지 침묵했다. 다만 경찰이 그를 데려갈 때, 그는 나를 한 번 보았다.

그 눈빛에는 원망이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피로가 있었다. 오랫동안 범인을 쫓던 사람이, 결국 자신이 범인의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눈.

오세린은 떠나기 전, 해운당 현관에 걸린 낡은 바이올린을 보았다. 윤태오가 수집했다던 악기였다. 그녀는 잠시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저건 이제 누구 것이죠?”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백승호는 경찰에게 녹음기와 윤태오의 지시를 설명했다. 그는 범인은 아니었지만, 그 밤의 공포를 키운 한 조각이었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여전히 와이어 자국 같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서재에 올라갔다.

비가 그친 창밖으로 희미한 아침빛이 들어왔다. 밤새 괴물처럼 보이던 숲은 이제 젖은 나무들의 군락일 뿐이었다. 그러나 집 안의 냄새는 그대로였다. 곰팡이, 젖은 나무, 식은 촛농, 그리고 죽음.

벽난로 안쪽의 긁힌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세로 두 줄과 가로 한 줄.

그것은 이름도, 고발도, 완성된 메시지도 아니었다. 단지 죽어 가는 인간이 마지막 순간 남긴 어설픈 흔적이었다. 범인을 가리키기에는 부족했고, 진실을 숨기기에는 너무 정직한 흔적.

추리소설에서는 흔히 죽은 자가 마지막 단서를 남긴다.

하지만 현실에서 죽은 자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침묵을 두고 싸운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누군가는 기억을 고치고, 누군가는 죄책감을 진실처럼 포장한다.

해운당의 밤도 그랬다.

범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죽이려 한 사람, 죽게 둔 사람, 마지막 숨을 끊은 사람, 증거를 숨긴 사람, 타인의 고통을 장난감처럼 갖고 논 사람.

윤태오는 죽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공포는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나는 해운당을 나오며 뒤돌아보았다.

젖은 기와 끝에서 마지막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똑.

돌확 위로 퍼진 파문이 잠시 흔들리다 사라졌다.

그리고 오래된 집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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