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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 시대극/경제+정치+사회

마르크스 vs 케인즈, 그리고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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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 vs 케인즈, 그리고 빨갱이 [25]
  • bizlink biz**** bizlink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912710 | 10.03.1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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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vs 케인즈,

     

     

     

    그리고 빨갱이




     

     

     

     

     

    이 글은 1969년 여운형 선생이 작성해 신동아 11월호에 실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고문 '대중경제를 주창한다' 중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경제학의 큰 줄기를 양분하고 있는 칼 마르크스와 케인즈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시각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시각이다.

     

    읽고 그대의 사고와 견주어보기 바란다.

     

     

     

     

     

     

     





    '마르크스'의 망상과 환각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사회는 고전파경제학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경제사회도 아니고, 또 1930년대의 경제사회도 아니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전후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그러면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실천적인 의미에서 평가하고 검토할 만한 경제학은 대체 어떤 것인가.

     


    만약 지금까지의 경제학의 유산 가운데서 찾는다면 하나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제국가경제를 이끌어 나온 '마르크스' 경제학과, 또 하나는 자본주의 제국의 경제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주류를 형성해온 '케인즈' 경제학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경제학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될 것인가.





     

     

     

     

    먼저 '마르크스' 경제학은 역사의 유물론적 해석 -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저로 하여 일절의 사회경제현상이나 정치적 사건, 전쟁, 혁명, 정치형태, 문화, 사회관습에 이르기까지 인류행위의 모든 것을 망라하여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라는 논리가 수미일관으로 관철되어 인간의 의사나 행동에까지 미치고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장래를 논함에 있어서 인간의 중지와 노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그려놓은 미래상만을 확신하고 고집하는 결정론자의 이론이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인류의 장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사회는 공산주의사회 이외에 다른 어떤 사회도 있을 수 없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폭력혁명조차 올바른 실천이라는 이름 아래 신앙적으로 긍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론도 스스로 이론적인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유물변증법적 해석에서 인간사회에 불변의 영원한 질서란 있을 수 없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사실 낡은 질서는 새 질서로 교체되면서 인간사회의 역사는 몇 단계의 발전을 거듭해 나왔다. 물론 오늘의 자본주의도 분명히 영원한 질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질서도 크게 변모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사회발전의 다음 단계가 반드시 공산주의 질서라는 보증도 없으며 공산주의 제도 이외에 다른 어떤 질서도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지구상에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체제가 소련 및 동구와 아시아의 일각에 존립하고 있다. 특히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는 10월 혁명 후 50여년의 세월을 경과하였다.


     

    '마르크스'는 일체의 사물은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하고 이 대립물의 모순, 상극을 통해서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공산주의만은 대립물의 통일체가 아닌 완전무결의 영원한 존재이며 질서인가. 인간사회에 불변의 영원한 질서란 있을 수 없다는 '마르크스' 자신의 명제는 인류의 지난 과거사와 오늘의 자본주의에만 타당하고 공산주의 체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인류가 지금까지 체험한 모든 질서가 영원한 질서가 아닌 것처럼 공산주의도 불변의 영원한 질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공산주의만은 영원의 이상적인 질서라고 고집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 '마르크스'의 명제를 뒤집어엎지 않을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될 것이다.





     

     

     

     

    J.A 슘페터는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 종교이다. 신봉자에게는 그것은 첫째 인생의 의의를 체현하고 또 사건이나 행동을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는 궁극적 목적으로의 체계를 부여하고, 둘째 구제계획과 인류 내지 그의 특정부분이 구출되어야 할 죄악의 예시를 포함하는 목적에서 지침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는 묘혈의 저편에 천국을 약속하는 종교의 일파에 속한다고 명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혐오했으나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과학의 이름 아래 전개한 이론은 바로 종교적 결정론이었다. 그리고 오늘 현실의 사회주의 경제는 체코의 자유화 운동으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계획경제라는 이름 아래 감행된 국민경제의 인위적, 기계적 운영이 점차 심각한 차질과 한계성을 드러내어 자본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사회주의의 체제적 모순을 확대, 심화하고 있다.

     

    한때 자원과 노동의 강제동원으로 고성도장(高成度長)을 자랑하던 소련이나 그 밖의 후발 사회주의국가가 오늘에 와서는 경제성장률의 현저한 둔화와 동맥경화증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케인즈 경제학의 실패


     

    한편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경제사회의 현저한 결함은 완전고용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부와 소득의 자의적이고도 불공평한 분배이다'라고 하여 이러한 체제적인 모순에 대한 시정, 구광책(구제책)을 전개한 '케인즈'의 경제학은 어떠한가.


     

    케인즈가 그의 주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전개한 이론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시민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생산력에 대응하는 생산량, 그리고 그 국민소득은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한계소비성향'은 늘어나나 1보다 작다. 이 때문에 사회의 소비의 증가율은 국민소득의 증가율에 미급하다.

     

    소득에서 소비를 하고 남는 부분인 저축은 점차 증대하게 되나, 그것은 반드시 생산물에 대한 '유효 수요'의 증가로 나타나지 않는다. 저축된 것이 유효 수요가 되려면 그것이 '투자'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국민경제의 운행이 원칙적으로 사적 자본가의 이윤동기에 의한 창의와 책임에만 위임되고 있는 한, 저축된 부분이 그대로 유효 수요가 되어 투자된다는 보증은 없다.

     


    개인주의적인 자본가의 채산에서 보면 자기가 갖고 있는 화폐자본을 산업계에 투하하여, 즉 투자하여 이윤을 획득할 수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투자하지 않고 현금으로 보유하여 후일 이것을 대부하여 이자를 취득할 수도 있다. 저축된 결과가 일반개인이나 또는 민간은행을 통해서 투자된다면 유휴자본설비가 동원되고 또 실업상태에 있던 노동자는 취업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케인즈'적인 의미에 있어서 생산자원의 불완전고용상태가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가 언제나 반드시 발생된다는 보증은 없다. 투자하는 사람은 '자본의 한계효율', 곧 '자본의 예상수익율'과 '이자율'과를 비교하여 후자가 전자보다 클 경우에는 애써 투자하지 않고 그것을 현금으로 보장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노숙기(老熟期)에 있는 자본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생산력이 극도로 발달하여 자본의 축적은 엄청난 액에 달하고 있기는 하나, 경제의 발전은 자본의 축적도에 비하여 크게 둔화되고 있다. 노숙기의 자본주의 사회에선 이자율은 비교적 낮은 상태에 있으나 이 낮은 이자율을 초과할 정도의 자본의 수익률이 기대되는 투자기회란 그렇게 많지 않고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투자는 제한되어 있다.

     


    이 한정된 투자기회에 대응하여 불완전고용상태가 당연히 발생되지 않을 수 없다. 즉 생산자원이 스스로 일할 능력을 갖고 또 일하고 싶은 의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할 수 없는 상태, 곧 '비자발적 실업'의 상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자발적 실업이나 자본설비의 유휴상태가 오늘날 선진자본주의국의 경제를 마비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체계적 모순이라고 '케인즈'는 말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풍부하기 때문에 생긴 빈곤', 곧 생산력의 미발달로 인한 빈곤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과 생산력의 과도한 발달 때문에 생긴 빈곤이며, 따라서 이와 같은 사회에 있어서는 저축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유휴자본설비를 가동시키고 나아가서 잠재적 생산력을 현실의 생산력화 했을 경우 쏟아져 나오게 될 방대한 생산물을 흡수하는 데 필요한 유효수요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체제 하에서는 비례적으로 증대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경제는 노동을 비롯한 제생산자원의 완전고용 이하의 점에서 균형될 수밖에 없고, 비자발적 실업은 증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원의 불완전고용과 비자발적 실업의 해소를 위하여 '케인즈'는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자동적으로 증대될 수 없는 유효수요의 인위적인, 정책적인 증대책을 제안했다. 이자율의 조절을 통해서 민간투자의 촉진을 꾀하고, 이러한 조치가 크게 주효하지 못할 경우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여 유효수요의 부족을 정부투자를 통해서 메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이상 간단히 '케인즈'의 소론을 약술했는데, 여기에 대중경제적인 입장에서 한두 가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을 포함한 제생산자원의 불완전 고용과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고 자본주의의 체제적인, 내재적인,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면 정부의 간섭이나 일시적인 유효수요 증대책만으로 이러한 문제가 항구적으로 해소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고,


     

    둘째는 설사 유효수요의 인위적 증대책으로 생산자원의 완전고용이 달성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산수단이 자본가에게 귀속되어 있는 자본가적 경제 질서의 기능회복을 의미하는 데 불과한 것이고, 자본가에게 예속되어 있는 근로대중의 지위나 복지향상 등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서 이윤동기에 의한 자본가의 기업 활동의 결과인 파생적인 효과에만 일임되고 있는 것이다.


     

    즉 '케인즈'는 노쇠기의 자본주의의 기능회복에만 급급하여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운행만 지속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가의 기업 활동을 통해서 일반 근로대중에게는 취업의 기회만 부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사상적인 입각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중의 보다 적극적인 생산참여나 분배소득의 증대를 통한 복지향상 등의 문제는 제2차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적 경향은 '케인즈' 이후의 근대 경제학에 그대로 계승되어 '포스트 케인지안(후기 케인즈 학파)'이나 오늘의 후진국개발이론도 따지고 보면 결국 '케인즈'적인 입장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이념적으로는 근로대중의 왕국 건설을 염원했으나 그실 획일적인 기계적 계획은 생산자원의 효율적인 동원과 생산성의 제고를 곤란케 하여 경제성장의 둔화를 초래하고, 한편 강력한 독재체제는 계획의 차질과 경제성장의 둔화를 근로대중의 일방적인 억압을 통해서 막아보려 하고 있다.


     

    그리고 '케인즈'의 경제학이나 '케인즈' 이후 수 갈래로 발전하고 있는 소위 '근대 경제학'도 따지고 보면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체제적 모순, 특히 근로대중 문제의 해결에는 무력함을 스스로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몇몇 나라에서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그 고도성장에는 근대 경제학의 이론이 크게 공헌했다고 하나, 고도성장이 곧 대중생활의 고도향상이 아니라는 현실을 목도할 때, 절대다수인 대중은 여전히 소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학도 부재상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여기에 또한 '대중경제론'이 제창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1970년이 오기도 전, 그는 두 경제학의 단점을 이렇듯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악의적인 정치적 의도로 생산, 확대된

    어불성설과도 같은 오해에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이 시점,

    나는 또 다시 악의적으로 확대, 재생산될

    각종 정치적 목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함으로써

    '정치적 선전에 휘둘리지 않는 올바른 선택'으로

    향하도록 독려하고자 한다.

     

     

     

     

     

     

     

     

     

     










    "누가 그를 빨갱이라 했던가!!


     

    당신인가!?"


     

     

     

     

    "더러운 획책자들!

     

     

    더러운 분리주의자들!!

     

     

    더러운 매국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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