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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 시대극/경제+정치+사회

(탈세조선)정청래입니다.........책 광고 하나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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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청래입니다. 오늘 어떤 반가운 분과 국제 통화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어쩌면 잘 아는 분이지요. 오한흥. 옥천에서 안티조선운동을 펼친 전설같은 분입니다. 이 분에 관한 책이 나왔습니다.

 

옥천의 안티조선의 명장에 관한 이야기 <고삐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내다.>

 

이분이  한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참 의미심장한 말을 했네요. 한번 같이 감상해 보시지요. 세상에 소금같은 이런 분들이 있어 사회가 그래도 덜 썩고 있나 봅니다. 많은 귀감이 됩니다. 여유 있으시면 이 분 책 한권도 사시고요....

 

................언론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옥천신문'이라는 매체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한흥이라는 이름도. '옥천전투'라고까지 불린 안티조선(조선일보 반대) 운동을 고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 농촌 마을 옥천에서 이끌었던 그다. 그의 삶과 꿈이 <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 내다>(정지환 지음ㆍ푸른나무 발행)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농촌 집짓기 사업과 주간지 '여의도 통신'을 발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요즘도 그 에너지는 여전해 보였다. 오 전 대표는 특유의 직관적 표현으로 광우병 문제에서부터 작금의 금융위기까지 콸콸 말을 이었다.

 

"광우병의 핵심은 소가 소를 먹어서 미쳐버린 것 아닌가요. 나는 금융위기의 원인은 결국 자본이 자본을 먹어 미쳐버렸기 때문이라고 봐요. 자본은 노동을 먹어야 하는 건데…." 그 에너지가 있는 한, 옥천은 오래도록 건강한 곳으로 남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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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으신 분은 안 읽으셔도 됩니다.----------------------------
얼마전에 오한흥 이분에 대해 제가 썼던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청래입니다. 옥천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옥천’하면 무슨 생각이 되시나요? 옥천은 박정희 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고 육여사의 오빠인 육인수씨가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했던 지역입니다. 어쩌면 유신독재의 본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옥천은 대통령 영부인을 배출한 지역인 것은 맞지만 또한 이 땅의 참 언론인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합니다. 그 첫 자리에 조동호 선생이 있습니다. 조동호 선생에 대한 검색을 해보니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조동호 선생은 1932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를 인수 확장하여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무기명으로 항일 논설을 계속 집필하였으며 다시 2년간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했고, 또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생을 하게 된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제거사건에 배후인물로 결국은 조선중아일보가 폐간하게 된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지금의 조선일보가 한 일이 아닙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진짜 조선일보가 조동호 선생 등이 주도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당하고 방응모씨가 금광을 해서 번 돈으로 새로 친일 신문사를 하나 창립했는데 제호를 조선일보로 붙여서 찍어낸 신문이 지금의 조선일보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조선일보가 민족지 운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지요.

 

또 한분 옥천의 참 언론인이 한 분 계십니다. 송건호선생 이십니다. 송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인 2001년 12월 21일 KBS 9시 뉴스는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앵커: 한국 언론 자유의 사표인 청암 송건호 선생이 오랜 투병생활 끝에 오늘 새벽 별세했습니다. 언론직필 외길을 살아온 송건호 선생의 발자취를 이승기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고 송건호 선생의 일생은 언론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서울 법대 재학중이던 1953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선 고인은 경향신문과 조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지난 75년 동아일보 기자 150여 명이 강제 해직되자 사표를 던졌습니다. 이후 84년에 해직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월간지 말을 창간했으며 말지가 폭로한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은 87년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피기도 했습니다.

 

옥천은 이처럼 조동호 선생과 송건호 선생이 태어난 고장이고 월북시인 정지용의 생가도 이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신시절 육영수 여사의 위세에 가려졌던 그 옥천 땅에서 조선일보가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동호 선생과 송건호 선생의 고향보다는 육여사의 고향으로 더 많이 알려졌던 옥천이 안티조선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본질 없이 현상이 없고 이유 없이 결과가 없습니다. 옥천이 지금처럼 조선일보 부수가 줄고 안티 조선의 성지가 된 데는 또 한명의 참 언론인이 있었습니다.

 

오한흥.

그가 바로 지금의 옥천을 일구어 낸 주인공입니다. 저는 이분의 나이도 이 분의 직업도 잘 모릅니다. 그냥 옥천에 <꼴통기질>의 언론개혁 운동가로 그를 알고 있습니다.

 

한 달 전쯤 오한응(전 옥천신문사 대표)씨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아 그 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참 재미있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초청강연 이었습니다. <석탄리 주민총회 초청강연>이었습니다. 반상회 하듯 주민들 20여분 모아 놓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터에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오신 시골 양반들 앞에서 그럭저럭 30분을 성의 있게 말씀드렸는데 제가 한 강연 중에서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을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모여서 토론을 통해 마을 일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청중은 적었지만 가장 인간적인 냄새가 풍기는 강연회였습니다. 오한응 대표가 아마 마을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고풍스럽게 지은 오대표의 집(‘안터’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에서 술한잔 기울이며 새벽 2시까지 정담을 나누면서 오대표의 캐릭터를 확인했습니다. 오대표의 부인은 옥천 시내에서 조아세(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 돈까스 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조아세 돈까스 먹으러 가자.”라는 말을 할 때 오대표는 묘한 흥분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오한흥. 본인 입으로 개인적인 말은 잘 안 하지만 그는 동네에서 좋게 말해서 말썽꾸러기 나쁘게 말해서 건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한겨레 지국장을 맡아서 세상을 보는 눈을 다시 떴고 조선일보의 패악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옥천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그야말로 가열 차게 했다고 합니다.

 

2000년 옥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조선일보 없는 옥천 건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옥천언론문화제에 참석해 보니 오한응 대표가 상복을 입고 상주가 되어 “아이고 아이고...”하며 문상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조선일보 사망 민족정기 부활>이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어서 참 기발한 아이디어라 생각했습니다.

 

항상 누구라도 붙잡고 조선일보의 폐해를 말하고 안티조선 스티커를 옷에 붙이고 일부러 서울에 오면 전철을 타고 다닌다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책으로 나옵니다. 옥천 군청에서 이부자리 깔고 1인 시위를 하다가 재판에서 벌금이 구가되자 다시 옥천군청에 가서 <벌금 구걸 1인 시위>를 해서 옥천군청 공무원들에게서 벌금을 충당했다는 그의 독특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내다.>(푸른나무) 필자는 오랜 기간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정지환 전 말지 기자입니다. 걸쭉한 입담과 너스레 요절복통 기상천외한 그의 삶에 대한 장면과 그의 철학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랍니다.